새 봄 같은 생명력이 충만하게 깃든 맑고 귀한 동시집
이 봄과 잘 어울리는, 온기와 힐링을 필요로 하는 마음들을 품는 동시집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가 나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너와 나, 이것과 저것 간 인연의 소중함과 조화로움을 노래한 이 동시집을 읽다 보면 웅크린 생명이 움트는 봄처럼, 어느새 마음에서 따뜻함이 간질간질 피어오른다. 해설을 쓴 이안 시인은 ‘작품 대부분이 동시 문법에 충실하여 안정되어 있으며, 시의 발화점을 정확히 찾아내어 한 편의 시로 가꾸어 내는 솜씨도 뛰어나다. 감정의 과잉이 없고, 언어 운용에도 허튼 낭비가 없다. 많은 동시 자산을 가졌다’고 평하며 신인의 출발을 축하했다. 이 동시집은 마치 ‘한해살이풀’처럼 인생의 매 순간을 단 한 번뿐인 것으로 여기며 ‘죽을, 힘을 다해/ 뿌리 내리고/ 줄기 뻗고 /이파리 내고/ 꽃 피우고/ 푸짐하게 열매 맺’기를 뜨겁게 소망한 기록들을 차곡차곡 묶은 것이다.
관계의 행복을 노래하다
세계의 처음은 어디일까. 안진영 시인에 의하면, 이 세계는 간절한 부름과 부름이 원인이 되어 탄생했으며, 우리는 평생을 그 부름과 부름의 사이를 균형 잡아 가며 살아간다. ‘관계’야말로 안진영 동시의 핵심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오랜 시간 함께하든 사소하게 스쳐가든 관계없이 자신에게 허락된 만남들을 ‘인연’이라고 부르며 귀히 여기는 세계관은 동시집 전반에 걸쳐 편안한 행복감을 낳는다.
네가 나를 불렀어
내가 너를 불렀어
서로서로 간절히 불렀어
-「인연」전문
시인이 가장 먼저 주목한 인연은 가족과 마을이다. 할머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닭들과 개,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꼬마가 있다. 아이의 눈으로 본 할머니의 마당은 ‘집 식구 보다 마당 식구들이 더 많은’ 품이 넓은 곳이다. 그 평화로운 마을은 ‘강아지들도 서로 병문안 가는’ 곳이며, 여덟 살 내 동생이 젖동냥 받고 자란 심청이처럼, 주민들의 호의와 관심을 양식 삼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곳이다.
앞집 할머니한테 이야기 한 자락 얻어듣고
뒷집 아저씨한테 욕 한 바가지 얻어듣고
학교 선생님한테 꿀밤 한 대 얻어맞고
모퉁이 동무 집에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가겟집 할머니한테 사탕 한 알 얻어먹고
우리 동생은 심청이다
온 동네 사람들한테 젖 얻어먹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동생 함께 키운다
-「여덟 살 우리 동생」전문
동심이 살아 뛰노는 동시집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남다른 생동감과 구체성을 띠고 있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이기도 한 시인이 동심을 머리로 지어내지 않고, 현장에서 마주하는 생생한 장면들에서 시심을 길어 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훈적인 말투나 권위 의식, 억지스러운 과장이 없어 담백하고 편안하게 읽힌다. 화를 내며 ‘손 감고 머리 위’라고 외친 선생님의 실수에 아이들이 웃자 뒤돌아서 슬며시 웃음을 짓는 천진한 어른이자, 자신이 반가워 뛰어온 아이와 볼을 비빌 때의 따스함을 좋아하는 행복한 교사이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평등한 호혜의 관계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3월이 되면 작년에 한 반이었던 친구를 찾아 ‘복도를 오작교 삼아’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읽는 사람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선생님이 내 일기 밑에
우리 익규,
오늘 이쁘다, 라고 써서
나도 선생님 글 밑에
우리 선생님,
오늘 이쁘다, 라고 썼다
-「댓글」전문
그런가 하면, 아이의 입장에 서서 어린이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처럼’ 숨 가쁘게 시험을 치러야 하는 그릇된 교육 현실을 따끔하게 꼬집기도 한다.
공부해라
학원 가라
숙제 해라
조그만 그릇에 연이어 쏟아부으니
흘러나올 수밖에요
줄줄 흘러넘칠 수밖에요
-「스트레스」전문
하지만 이 동시집은 무언가를 고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아이들의 마음을 들려주는 것에 초점이 맞춘다. 그것은 ‘착한 아이’라는 강요된 틀로 가둘 수 없는, 획일화된 제도로는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한 명의 인격체로서의 진짜배기 동심이다. 아마도 안진영 시인은 조금 당돌하고 때론 조금 산만하더라도, 아이들의 살아 있는 웅성거림과 움직거림을 무척 어여뻐하는 어른일 것이다.
착하다
착하다
자꾸 그러지 마세요
위, 아래, 오른쪽, 왼쪽 꽉 막힐 때도 있는걸요
좋은 마음이 빠져나올 틈
없을 때도 많다구요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
-「고백」전문
너 왜 자꾸 거기로 가는데.
거기가 길이야.
멀쩡한 길 놔두고 왜 하필이면 그 길로 가니.
그냥요
그냥 한번 걸어 보고 싶어서요
-「소풍 가는 길에서」전문
새로운 형식적 실험, 파자시(破字詩)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파자시(破字詩, 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누어 쓴 시)라는 실험적인 형태를 선보이며,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파자시들이 전체의 시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 읽을 수 있다.
누나(女)가 넘어지면
아프다는 곳을 남동생(子)이
호, 불어 주고
남동생이 넘어지면
아픈 곳 더듬어 누나가
호(好), 호(好) 불어 준다
-「오누이」전문
좋을호 자의 자획을 풀어서, 누나와 남동생의 친근한 광경으로 만들어 낸 파자시다. 누나와 남동생이 상처 난 곳을 서로 ‘호호’ 불어줄 때의 소리와 ‘좋을 호’자를 매치되면서 귀여운 느낌을 준다.
작은 아이들이(玄)
산에(山)
숨어 있으면서(幽)
“나, 잡아 봐라.”
숨바꼭질한다
-「머릿니」전문
머릿니의 시각으로 보면 머리카락이 마치 덤불이나 산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상상이 담긴 파자시다. 머릿니가 들락거리는 모습을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는 모습에 비유했다. 어렵게 느껴지곤 하는 한자가 쉽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제주의 깊고 푸르른 바다를 닮은 동시집
착하고 밝은 시들로 이어지던 시집은, 마지막 부에 이르러 시인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적 세계를 꺼내 보여 준다. 시인이 나고 자란,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고향 제주의 아픈 기억에 대한 시도 있고,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을 통찰하는 시들도 있으며, 하루하루를 자족하며 온 힘 다해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그린 소박한 시도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 이르러 안진영 동시에서 느껴지는 밝음과 아이 같은 천진함이 사실은 오랜 시간 숙련된 내면의 관조로부터 퍼져 나오는 것임을, 세상의 소리 없는 고통들을 어루만지려는 겸허함으로부터 시심이 출발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동시들이 더욱 단단하고 미덥게 느껴진다.
아침에 봉오리를 펼치며, 오늘 하루 행복할 거야
저녁에 봉오리를 오므리며, 오늘 하루 행복했어
-「민들레꽃의 하루」전문
밥이라는 글자에는 그릇이 두 개 있다
(중략)
4‧3때 사람들한테 쫓겨 산에 숨어 있던 할아버지가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올지 몰라
밥 한 그릇 따로 남겨 두셨던,
그 옛날 그 몸짓, 몸에 꼭 붙어 있던 탓에 배부를 날 없었던 할머니의 밥그릇
-「밥」부분
이안 시인이 안진영 시인을 일컬어 ‘동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을 만한 사람의 바탕이 순정하여 든든하고 미덥다.’라고 짚은 데에는, 자신의 속을 울려 바다에 있는 동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시 「나무 물고기」내용처럼, 사는 동안 자신의 품을 넓혀 ‘마음의 식구’들을 늘려 가고자 하는 시인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는 첫 눈을 맞이한 아기 고양이처럼, 앞으로 뻗어나갈 시간들에 대한 설렘 가득한 모습으로 뽀얀 마음의 속살을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윤봉선 화가의 담백하고 천진한 그림도 동시집을 한껏 빛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