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혁명
이 책은 단지 정신분석의 혁신가에 그치지 않고 ‘주체의 혁명’을 설파한 ‘해방의 사상가’로서 라캉을 새롭게 조명한다. 20세기 지성사에서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 그만큼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인간 라캉’에 대한 회고이자 그간 간과되어온 ‘라캉의 정치성’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하다.
라캉은 사르트르와 달리 사회참여에 무관심했는데도 68혁명의 한 배후로 지목되었다. 당시 라캉은 고등사범학교에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고, 1960년대 초부터 지성계를 뒤흔든 ‘구조주의’의 흐름에 동참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 알튀세르, 푸코 등이 주도한 구조주의는 68년 학생운동의 주요한 사상적 기반이었으며, 특히 라캉과 알튀세르의 제자들이 모여 만든 잡지 『분석을 위한 노트』는 68혁명 당시 고등사범학교 출신 좌파 지식인들의 산실 역할을 했다. 알랭 바디우를 비롯해 라캉의 공식 후계자인 자크알랭 밀레, 언어학자․철학자인 장클로드 밀네 등이 잡지 편집진이었고 이들은 마오주의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하지만 라캉 자신은 정치적으로 계몽적 보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에게 “진정한 혁명, 가장 소망할 만한 혁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었다. 사르트르처럼 거리시위에 나선 적도 없고 심지어 68혁명 당시엔 운동가로 나선 제자에게 “내가 바로 혁명이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라캉은 분명 정신분석의 혁명가였다. 라캉은 철학과 언어학, 구조주의 이론을 접목해 프로이트 이후 점점 교조화되고 치료 중심으로 획일화되던 정신분석을 혁신했다. 그런데 라캉에게 영향받은 일부 라캉주의자들이 급진적 정치 혁명을 꿈꾸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라캉의 이론에 그런 정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라캉의 주체: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
바디우는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라캉의 주체 개념에서 찾는다. 바디우에게 라캉은 주체의 해방을 도모한 사상가였다. 주체의 혁명과 정치의 혁명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자체 혁명이자 청년 반란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으며 심지어 코뮌주의의 진정한 실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마오주의는 68혁명의 중심 추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는 라캉의 테제로부터 ‘반항하는 것이 옳다’라는 마오주의 강령을 읽어내는 바디우는 라캉 주체 개념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라캉을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셈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라캉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저의 방식이죠. 해방이, ‘법’을 비틀고 거기에 예외를 만드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해방은 어떤 국지적 형상 속에서, 어떤 예외 속에서, 정해진 질서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 속에서 돌발하는 겁니다. 사회 전체의 느닷없는 혁명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캉이 총체적 혁명이나 ‘위대한 저녁’을 믿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주체의 실천적 해방을 독단적으로 폐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비판합니다."(50-51쪽)
반면에 68혁명과 관련하여 루디네스코는 넌지시 마오주의적 라캉주의자들이 나중에 우파 자유주의로 돌아섰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라캉을 마오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라캉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었어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44-45쪽)
"라캉은 오로지 정신분석의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또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열망들을 무화시킬 줄 알았던 거죠. 그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함으로써 상징적 울타리 노릇을 했어요. ‘저에게 오세요. 혁명이나 극단적 행동보다는 그게 낫죠.’""(47쪽)
라캉 개인의 정치적 태도를 바디우도 모르지 않는다. 바디우가 보기에 라캉과 마오주의자들의 관계는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상·규범상태 안에 기입된 ‘아무것도 아닌 것의 기호’인 바디우의 ‘사건’은 “정해진 질서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 속에서 돌발하는 것”인 라캉의 ‘실재’에 다름 아니다. 젊은 시절 사르트르주의자였던 바디우는 이 공백의 주체가 지닐 수 있는 정치적 능동성을 더 강조할 따름이다.
정신분석의 철학자
바디우와 루디네스코는 라캉이 프랑스 지성계의 중심에 있었던 1960-70년대를 되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라캉은 1963년 정통 프로이트학파가 주도하는 국제정신분석협회IPA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때까지 생탄 병원에서 이루어지던 라캉 세미나도 이후 고등사범학교로 옮겨 진행되며, 라캉은 주류 정신분석계와 거리를 둔 자신의 독자적인 학파 ‘파리프로이트학교EFP’를 세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라캉의 명성과 영향력은 오히려 점점 커져간다.
라캉이 IPA로부터 제명당하는 데는 그의 ‘짧고 가변적인 상담 시간’이 주요한 빌미로 작용한다. 안나 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 등 자아심리학파가 주도하는 IPA는 엄격한 상담 시간 등 정해진 규칙과 기준을 정해놓고 이를 벗어나는 것은 사변적인 것, 즉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라캉은 이런 기술주의와 관료주의 성향이 오히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정도를 벗어난다고 보았다. 라캉은 환자들 개개인의 성향을 존중했고 그들의 언어에 주목했으며 분석치료 중 단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정신의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라캉은 정신분석과 철학의 교차로에 서 있던 인물이다. 바디우는 라캉이 전통적 주체 이해에 대항하는 반란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궤를 같이하지만, 이런 구조주의의 맹공으로부터 주체라는 범주 자체만큼은 지키고 싶어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신에 라캉은 주체라는 범주를 근본적으로 혁신한다. 라캉의 주체는 시니피앙의 연쇄에 예속된 주체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라캉의 혁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찰을 결부시킴으로써 현상학의 내밀한 경험성과 구조주의의 과학성 사이에서 주체 개념을 유지하려는 데 있다. 반면에 루디네스코는 정신분석이 어떤 철학적 혁명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을 철학자들에게 이해시키고, 동시에 정신분석가들을 철학으로 향하게 한 라캉의 역할을 높게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