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망명과 『공중전과 문학』의 가치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독일인이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발적 망명자’, 그러면서도 독일이 회피해왔던 독일 역사에 가장 집요한 관심을 쏟았던 W. G. 제발트. 국내에는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아우스터리츠』 등의 문학작품으로 먼저 소개된 그는, 논쟁적인 논문을 발표한 문학비평가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간된 『공중전과 문학』은 비평가 제발트의 목소리가 담긴 대표적인 저서로, 작가로서 명성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발표해 논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제발트 고유의 ‘산문 픽션’과 학술 논문 사이에 존재한다. 여러 갈래의 사유 가닥으로 글의 얼개를 짜나가고, 언어를 시각화하는 장치로서 사진 자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산문 픽션의 구조를 따라간다. 동시에 사실임직한 허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정확하고 방대한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전후 독일문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 논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이 책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끊어질 듯 계속되는 문장의 구사, 지워진 것을 떠올리는 기억의 고통, 집요한 기억하기에 대한 대가로 찾아오는 고독, 흔적을 되새겨나가는 여행과 산책 등이 그의 작품에서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문학적 의식이 역사 기술의 한 측면으로서의 문학, 사라진 흔적을 추적하는 기록으로서의 문학, 실천적 글쓰기로서의 문학을 소망하고 있다는 확인도 이 책의 소중한 결실이다.
공중전이라는 전쟁 — 파괴의 자연사
「공중전과 문학」은 영국군의 독일 공습 당시 상황을 분석하고, 공습으로 희생된 수많은 독일 자국민에 대해 애도하지 못했던 독일 국가와 전후문학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은 자칫 보수적인 문학관이나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태도 일면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에, 섬세한 시각에서 읽어내야 한다.
이 글의 기본 전제는 전쟁의 무상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제발트는 이차대전 막바지에 독일 전역을 초토화시킨 공중전이 처음부터 나치스 독일에 대한 보복전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이 공중전 전략은 이차대전 당시 사면초가에 빠져 있던 영국이 전쟁의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방책이었다고 본다. 이 공중전은 곧 전쟁의 본질을 드러내어, 정치나 도덕, 인력의 개입, 억지력을 넘어 자기 동력과 자기 논리로 가동되는 재앙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쟁을 국가 차원이 아닌 자연사적 특징과 재앙의 측면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문학의 침묵 —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함
이 책이 독일 사회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제발트가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을 우회하여 이차대전 이후 현대 독일 사회의 ‘집단적 망각’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트는 오늘날의 독일 국가가 공습으로 희생된 시체를 몰래 묻어버리고 지워버리는 은밀한 집단적 죄를 통해 결속을 다지고 있다고 폭로한다. 실제로 독일은 공습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기억하며 평가하는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독일의 특수한 처지 때문이다. 이차대전중 극악무도한 범죄를 수없이 저지른 독일로서는 전쟁중에 일어난 자국민의 피해를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둘째, 독일 국민 스스로가 나치스와 관련된 과거를 하루라도 빨리 씻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열망에 가득차 있었다. 그들에게 공습으로 파괴된 독일 도시는 아픈 상처이기 이전에 수치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왔다. 여전히 공습 피해가 적절하게 애도된 적이 드물며, 독일 국민 대다수가 이를 애도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망각되어버린, 별다른 의미도 남기지 못하는 과거사가 된 것이다. 제발트는 이를 화려한 경제 기적에 감춰진 독일의 병든 속내라고 일축한다.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독일문학을 향한 것이다. 그는 독일문학 전체가 공습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보여준 무능력과 무책임을 문제삼는다. 제발트는 독일 전후 문학이 나치스 시대에 와해된 독일문학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을 공습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거나, 얼마간 다루었다 해도 매우 미흡하고 부적당한 방식으로 다루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 테제를 논증하기 위해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같은 유명 소설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몇몇 예외적 대목을 제외하고 이들 작품이 하나같이 부적당한 방식으로 파괴, 죽음, 종말, 희생의 문제를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전쟁과 파괴를 문학으로 서술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가. 제발트는 고통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문학의 본령은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고 탐구하고 애도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는 특히 후베르트 피히테가 파편적 메모로 구성한 소설과 비판적 지식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다큐멘터리 기법을 예로 들면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즉 제발트에게 문학은 ‘객관적’ 역사 기술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드러내는 것, 또는 역사 기술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또다른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인 것이다.
과거의 은밀한 삭제 — 거짓 의식으로 형성된 문학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살핀 성찰의 문학적 사례로서 작가론 「알프레트 안더쉬」를 함께 실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작가인 안더쉬는 전후 독일문학 재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하나로, 이른바 독일문학의 ‘원로’이다. 이 글을 통해 전후 독일문학의 아버지와도 같은 작가를 거침없이 비판했던 제발트는 이후 독일문단의 냉담한 시선을 감수해야만 했다.
제발트의 시선에서 안더쉬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수정한 ‘타협주의자’에 불과하다. 제발트는 제3제국 시절 안더쉬의 행적을 집요하게 문제삼고 이를 그의 문학작품과 연결하여, 자기 이미지를 미화하는 일에 몰두했던 작가의 수치스러운 초상을 폭로한다. 더불어 안더쉬에 대한 세간의 평을 통해 전후 독일문학과 독일 사회의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왜곡된 자의식과 역사의식에 대한 날선 비판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이 글은, 과거에 권력과 타협했던 문인들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사회에도 시의성 있는 성찰의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