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너’는 스물다섯의 소르본 대학생이다. 파리의 한 후미진 칠층 고미다락에 사는 이 청년은 바로 저 문장에서부터 시작해 이 기이한 의식의 배회, 잠의 모험에 나선다. 그는 ‘일반사회학 고등교육 자격증’을 위한 일차 필기시험을 앞두고 있고, 관계를 확장하고 장래를 설계해야 할 나이에 있다. 그러나 주인공 ‘너’는 저 첫 문장에서 보다시피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는 어느 날,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가물가물한 방을 훑어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의 초점만 맞추고 있다. 이제껏 세상은 이 젊은이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다가가고 애를 써야만 볼 수 있는 피사체였다. 오늘 이 젊은이는 무심하게 자신을 방기해버리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 아니, 이제 세상이 한낱 피사체(피투체)에 불과한 ‘너’를 포착해야 할 때이다. 거기서부터, 이 낡은 세계의 잠꼬대 같은 놀라운 모험이 시작된다. 페렉은 제사에서 카프카를 인용하며 이 여정의 감감한 지도를 다음과 같이 펼쳐보인다.
“네가 집을 나갈 필요는 없어. 네 탁자에 앉아 그저 듣기만 해. 아니,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저 기다리기만 해. 아니, 기다리지도 말고, 오롯이 침묵을 지키며 홀로 있기만 해. 그러면 네가 그 베일을 벗길 수 있도록 세상이 네게 다가올 것이고, 세상은 달리 할 수 없기에, 경탄해 마지않으며, 네 앞에서 변형되기 시작할 거다.” ―프란츠 카프카, 『죄, 고통, 희망, 진리의 길에 관한 명상』
이 낡은 세계의 고독한 주인, 이십대 ‘너’의 무관심이 빚어낸 여기
『잠자는 남자』는 무관심의 수사학적 장소들, 무관심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조르주 페렉
이 젊은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고, 꼼짝없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오직 쥐새끼처럼, 고양이나 유령처럼, 밤이 되어야 겨우 파리 시내를 나간다. 한번은 파리를 벗어나 시골의 부모님 집에도 다녀온다. 별다른 것도 없다. 친구들이 찾아와도 문을 열지 않는다. 하다못해 일층에 있는 우편물도 찾으러 내려가지 않는다. 거리의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내버려둔다.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 반복하도록, 급기야는 “너는 이제 눈알 하나에 불과하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는, 잠들 수 없는, 눈알. 세계가 다가와 소곤댈 때까지, 이런 절대고독의 무관심 속에서 잠든 너를 톡톡 두드려 깨울 때까지, 주인공 ‘너’의 무심한 배회는 정처 없다.
미셸 페로가 말한 대로, 페렉의 이 소설의 제사에 인용된 카프카의 계획은 이렇게 성취된다. 실존주의자들이 무기력과 권태로부터 내지른 외침, 페렉이 이인칭으로 포착한 무관심과 절대고독의 외침은, 곧 이 낡은 세계에서 다시 새롭게 앓아내야 하는 모든 개인의 생(운명)을 겨냥하고 있다.
“너는 더이상, 이 세계의, 역사가 더는 손길을 내뻗지 못하는 세계의, 비가 내리는 것을 더는 느끼지 못하는, 밤이 오는 것도 더는 느끼지 못하는, 익명의 지배자가 아니다. 너는 이제 더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도, 맑은 사람도, 투명한 사람도 아니다. 너는 공포를 느낀다, 너는 기다린다, 클리시 광장에서, 내리는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본문 122쪽)
위의 마지막 문장에서와 같이, 결코 잠자지 않는(못하는) ‘너’의 이 지리멸렬한 여정은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진짜 모험이 된다. 즉 이 독백과 자기최면과 불가능한 말걸기가 오가는 종잡을 수 없는 중얼거림은, 한 개인의 삶을 골방에서부터 꺼집어내어 “익명의 지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단독자로서, 이 광장의 빗속에서 공포와 기다림으로 혼자의 운명에 맞서게 한 저항의 언어가 된다.
수없는 패러디와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문장
이 소설에서도 역시 페렉의 후기작에 나타나게 될 특징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책이 출간된 1967년 페렉은 울리포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이후 울리포의 자장 아래 자신의 작품세계를 실험적으로 이끌어나갈 행보를 예감하게 하는 맹아가 깃들어 있다. 수없는 작가-작품의 패러디, 인용과 다시쓰기 등 언어의 단순 조합을 통한 새로운 말의 창조 가능성을 일찌감치 페렉은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적 고백을 특징으로 하는 주관성의 일인칭도, 관조를 통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삼인칭도 아닌, 이 양자를 버무려 의식의 다양한 층위를 포착해낼 수 있는 이인칭 화법을 구사함으로써 주인공이 취한 세계관인 ´무관심´을 하나의 사건처럼 다룬다.
또한 페렉에게 중요한 것은 ‘기억하기’이다. 그는 나치의 가스실에서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그는 한시도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며, 하루하루 망각의 잠과 세월의 더께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기억한다”를 자신의 글쓰기 형식으로 승화시킨 작가다. 즉 망각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억하기, 차이를 겨냥한 수없는 작가들의 잊힌 문장들의 귀환이다. 페렉 스스로도 카프카의 일기와 허먼 멜빌의 ‘바틀비’에 영향받아 이 작품을 썼노라고 밝힌다. 그러나 여기에는 카프카, 멜빌 외의 수많은 작가들―레몽 아롱, 카뮈, 사르트르, 대니얼 디포, 프루스트, 디드로, 아폴리네르, 라마르틴, 플로베르, 프레베르, 클레지오, 바르트 등―의 문장에서 차용한 흔적들이 감쪽같이 주인공 ‘너’의 내면세계로 편입되어 있다. 그리하여 주인공 ‘너’의 말과 ‘그들’의 말이 뒤섞이고 서로 넘나드는 특징적인 문체의 이 소설은, 깜빡깜빡 명멸하는 의식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듯, 수없는 쉼표와 콜론과 세미콜론 등을 사용해 그려진다.
주인공 ‘너’의 동공(눈알)과 방과 창의 세계는 이 흐릿한 세계의 외곽을 다지는 작가의 눈이다. 이 소설은 그 눈의 이야기다. 세계가 한 인간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초점을 맞춰가는 이야기다. 페렉은 이 혼자 남은 단독자를, 그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