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참 써서
이렇게들 썼다,
쓰다 참, 사랑!
‘사랑’이라는 달콤한 거짓말 주위는 도는 ‘연애’의 쓴맛-
9인 9색 작가들의 선문답 같은 연애 상상!
소행성B612는 어린왕자만의 별이 아닙니다. 한 송이 장미꽃을 정성스레 가꾸는 어린왕자처럼 소설이라는 꽃을 가꾸는 사람들도 소행성B612라는 이름의 별에 있습니다. 소설창작 커뮤니티 소행성B612는 박상우 작가를 주축으로 함께 소설을 공부하는 이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곳에서 습작기를 거친 이들이 문단에 데뷔하여 작가가 되면, 저마다 독립적인 행성으로 궤도에 진입합니다. 이렇게 소설창작 커뮤니티 소행성B612에서 함께 공부해온 작가들의 모임 ‘행성궤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행성궤도’의 구성원은 총 아홉 명입니다. 소행성B612와 행성궤도의 스승 격인 박상우 작가를 제외하면, 다른 여덟 명은 2006년부터 2011년 사이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데뷔 후 이미 몇 권의 책을 펴내 독자들에게 친숙해진 이름의 작가도 있고, 아직 첫 책을 내기 전이라 다소 낯선 이름의 작가도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생 ‘소설’이라는 중심을 의식하며 일정한 궤도 활동을 해나간다는 것에 있습니다.
상호간의 거리 유지와 존재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각자의 고유한 행성 활동을 중시하는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바로 그들의 첫번째 프로젝트, 테마 소설집으로 말입니다. 그 테마는 ‘연애’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내 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주제지만, 동시에 그처럼 다양하고 그처럼 새롭고 그처럼 바래지 않는 화두는 또 없을 것입니다. 인생사 결국은 다 그놈의 사랑 때문에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고요. 인연, 관계, 기쁨, 욕망, 갈등, 미움, 고통 등 삶을 이루는 모든 상황과 감정이 어찌 보면 모두 이 ‘사랑’의 고리로 연결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비단 저만 해본 것은 아닐 테지요. 크고 단순하게,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결국은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지 않아서’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요.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알랭 드 보통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는 사랑의 딜레마를 이미 보여준 바 있잖아요.
그래서 다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들어가 ‘연애’입니다.
사랑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연애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 중에서도 ‘연인’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지요. 사람마다 저마다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듯 연애의 모습도 각기 다를 터. ‘행성궤도’의 아홉 작가들이 풀어놓는 연애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핑크빛 겉모습을 찢고 들어가 기어이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보고야 만다는 것. 그래서 제목 또한 『쓰다 참, 사랑』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작가들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하여 수록한 책의 첫 문을 연 작품은 구병모의 「파상풍」으로, 일상적인 이별이 갑작스러운 폭격 속에 파상풍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과정이 생생한 아픔으로 그려집니다. 이어지는 김민주의 「세상의 모든 고백」에서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사랑을 잃은 주인공의 뒤늦은 후회와 진심 어린 고백을 들을 수 있지요. 박상우의 「연애-메모-랜덤」은 연애의 갈망에서 삶의 호흡을 찾던 주인공이 우연히 마음을 이끈 한 여자를 통해 연애가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는 과정을 담고 있고, 박혜상의 「사랑의 생활」은 연애의 상대를 따라 매번 새로운 생활을 위해 떠나는 이와 그가 돌아올 집을 지키는 이의 서로 다른 생활의 이야기를, 이시은의 「베토벤 키스」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 끝에 베토벤의 현악 4중주의 12번처럼 격정적인 키스로 연애를 시작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지영의 「저기 누가 간다」는 주인을 사랑하고 질투한 휴대전화의 시선을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고요, 임수현의 「포도밭에서 너처럼 목이 말라」는 형의 연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 동생이 술 기운으로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마는 이야기예요. 정재민의 「아름다운 석양의 달콤함」은 사랑에 빠진 한 셰프의 설렘에서 고통까지가 달콤한 음식들과 함께 그려지고, 마지막 작품인 진보경의 「게스트하우스」는 서로 다른 상대를 사랑하는 이들의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엇갈림이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에서 펼쳐집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화법으로 풀어놓은 선문답 같은 연애 상상이 남기는 씁쓸한 뒷맛이 낯설지 않은 건, 어쩌면 우리가 사랑과 연애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사랑을 믿지 않는 자의 연대이거나.
각각의 「작가의 말」에서 이 아홉 작가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요.
“연애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에 대해 잘 모른다”(구병모)
“살아 있는 모든 관계의 종착역은 이별이다.”(김민주)
“지구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시뮬레이션 같은, 허구 같은, 홀로그램 같은 자기 찾기의 과정을 사랑이나 연애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박상우)
“사랑을 그다지 믿지 않는 사람이 연애 이야기를 쓰다보니, 누군가의 사는 이야기가 되었다.”(박혜상)
“어쩌면 연애는 자기를 잃고 놓아버리는 게임일지도 모른다.”(이시은)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간으로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나에게 ‘연애’란 그런 것이다.”(이지영)
“오래전부터 술의 문제로 이국으로 떠나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임수현)
“잉어는 다리 밑 어두운 곳에서 상류 쪽으로 머리를 둔 채 가만히 움직였다. 마치 무엇을 바라보듯이. (……) 그 움직임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닮아 보여 한동안 서 있었다.”(정재민)
“오래 머무를 수 없고 복잡한 규칙으로 얽혀 있는, 언제나 새로운 여정과 행운의 판타지로 기대되는”(진보경)
하지만 그럼에도, 이 쓴 사랑은 그리고 연애는, 너와 내가 있는 한 계속 씌어지겠지요. “쓰다 참, 사랑”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