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보다 유명한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낯선 이름이겠지만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어로 글을 쓰는 문학평론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 앞에 습관처럼 따라붙는 ‘문학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도 그가 현재 독일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독일인의 98퍼센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설문 결과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문학평론가로서는 ‘스타’라고 불릴 만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1920년생으로 올해 나이 93세인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독일의 지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제3제국의 유대인 탄압 정책에 의해 1938년 10월, 1만 2000명이 넘는 폴란드계 유대인들과 함께 추방당해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1943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기 직전 아내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한 농가에서 열 달 넘게 숨어 지냈다. 목숨을 걸고 아내와 자신을 숨겨준 주인 부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매일 밤 그들에게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의 작품을 이야기로 풀어 들려주었다고 한다(훗날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그의 체험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321~322쪽 참조).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폴란드군에 입대하여 정보부, 외무부 등에서 근무했고, 런던 주재 폴란드 총영사관에서 영사로 일하기도 했다. 1949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평론가의 길에 들어서서 여러 매체에 평론을 기고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공산주의 폴란드의 부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1958년 서독으로 돌아가 정착했다. 이후 독일 현대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단체로 일컬어지는 ‘47그룹’에 참여하며 독일의 작가들과 교분을 맺었고, 1960년부터 1973년까지는 주간지 『차이트』의 상임 문학평론가, 1973년부터 1988년까지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예부장으로 일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 독일에 알린 것은 1988년부터 2001년까지 14년간 방송된 〈문학 4중주〉라는 텔레비전 서평 프로그램이었다. 〈문학 4중주〉의 대표 진행자로서 그는 폭넓은 시청자층을 문학시장에 끌어들이며 문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독일 문단에서 그의 권위 또한 더욱 공고해졌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베스트셀러 순위가 바뀔 정도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솔직하고 거침없는 비평과 대중 친화적인 태도 탓에 페터 한트게, 마르틴 발저, 귄터 그라스 등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특히 마르틴 발저는 소설 『어느 비평가의 죽음』을 통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2012년 1월 27일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에 독일 연방의회에서 유대인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등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작가들의 초상화와 함께 읽는 매력 만점의 문학 에세이
1967년에 저자는 당시 몸담고 있던 회사로부터 집필 의뢰와 함께 그림 한 점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이후 (주로 독일) 작가들의 초상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받은 그림은 조각가이자 화가인 구스타프 자이츠가 그린 브레히트의 초상화였다(256쪽 참조). 이 책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평생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가 60점 넘게 실려 있다. 지인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림부터 경매장이나 골동품상 같은 곳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까지 소장 경로도 다양하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유명 작품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넘기며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어렴풋하게나마 독일문학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주제가 분명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컬렉션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판화, 석판화부터 에칭, 드라이포인트, 연필 스케치까지 그림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특히 브라질의 그래픽 아티스트 카시오 로레다노의 잉크 드로잉 작품을 여럿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그가 그린 하이네(72쪽), 슈니츨러(128쪽), 토마스 만(200쪽), 카프카(216쪽), 브레히트(252쪽), 귄터 그라스(329쪽) 등의 개성 넘치는 초상화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가 그린 뛰어난 그림들도 놓칠 수 없다(본문 316, 320, 324쪽). 수준급 화가로서의 귄터 그라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이런 작가들의 초상화를 한 점 한 점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글은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유쾌하지만 특유의 솔직하고 명료한 표현만큼은 일관된다. 특히 유대계 작가들에게 보이는 그의 편애는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하이네에 대한 이런 평가가 그렇다.
하이네의 서정시는 섬세하면서도 신랄하고, 격정적인 동시에 풍자적이고, 종종 슬프지만 그러면서도 익살스럽다. 해학이 있었기에, 독일인이자 유대인인 하이네가 온 유럽에서 받아들여졌고, 엄청난 사랑까지 받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유럽은 이 영원한 실향민, 이 망명자를 당대 문학의 중심인물, 세계 시인으로 보았고, 바이런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나. (75쪽)
하지만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지나치게 솔직하고 독선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교황’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작가와 문학을 대하는 자기만의 뚜렷한 비평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많은 문학평론가들과 다르게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어렵게 말하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 책은 문학평론가도 이처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문학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거장의 숨결, 잊히지 않는 고전의 매혹
문학은 넘쳐나도 교양의 차원에서 읽을 만한 문학 입문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고전으로의 여정에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줄 책은 여전히 드물다. 먼 나라의, 나이는 90이 넘은데다 이름부터 생소한 문학평론가가 쓴 이 책의 여러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고전이 가진 시대를 초월하는 힘과 아름다움을 역설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에서 왜 문학이 유의미한지, 그리고 왜 거장들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를 조금의 억지나 강요도 없이 자연스레 일깨워주는 것이다. 옮긴이도 말하듯이 “누구든 이 책에서 토마스 만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그의 말투를 흉내내어 장담하건대―「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찾아(혹은 다시)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또 누군가는 횔덜린이나 하이네의 시집을 손에 들고 책장을 펼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매혹이요, 이 책이 가진 가장 소중한 가치다. 평생을 독일문학에 헌신해온 한 늙은 비평가의 책을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문 속으로
과연 이 작품을 뭐라 불러야 할까. 심리 드라마, 역사물, 살인극, 혹은 시대를 망라하는 정치극, 아니면 철학적 비극? 그렇다. 이 모두에 다 해당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한 사람이 써낸 바로 그 한 작품이 말이다. 어떤 세대든 『햄릿』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문제와 고초, 자신의 좌절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대개는 찾던 것을 발견해낸다. 바로 이 점이 대단하고 기막히고 놀랍다못해 가히 불가해하며, 바로 이런 까닭에 『햄릿』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최고의 극작품으로 꼽힌다. (14~15쪽)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 천생 시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전부 실패였고, 시(詩)만이 예외였다. 자신의 열정과 두려움, 열등감에 스스로 부딪혀 속수무책인 채, 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부딪혀 어찌할 바 모른 채, 횔덜린은 피난처와 은신처를 찾아 헤맸다. 그는 오직 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든든한 버팀목을 원했고, 결국 찾아냈으니, 견고한 시문학 형식은 고군분투하던 그에게 구원의 방주가 되었고, 그는 대개 장중한 고대문학의 모범들을 탁월하게 모방했다. 그의 운문의 힘은 무엇보다도 형식에서 비롯되며, 형식에 의해 규정된 리듬에서 나온다. 그의 서정시가 지닌 최대 미덕은 특유의 운율이다. 횔덜린은 시를 마술적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사물들로부터 그들의 꿈과 노래, 그들의 시적 실체를 뽑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지상의 세계가 노래하게 했고, 그 노래가 울려퍼지게 만들었다. (44쪽)
고골이 사회 고발자였다면 톨스토이는 재판관이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스스로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면 체호프는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그는 결코 작중인물 위에 군림한 적이 없으며, 다만 항상 그들 곁에 서 있었다. 러시아의 다른 작가들이 목청 높여 신음하고 절규할 때, 그는 그저 나직나직 속삭였다. 하지만 지구의 절반이 곧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118쪽)
슈니츨러는 사랑과 죽음의 시인이었다. 체념과 파멸, 한없는 무상함을 그린 작가였다. 그의 인물들이 타인을 갈망한다면, 이는 그들이 타인에게서 무슨 큰 행복을 얻을 줄로 기대해서가 아니다. 이들의 바람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다만 보호받기를 바라며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이요, 의지할 데 없어 망명을 꿈꾸는 이들이요, 고통을 잠재워줄 진통제를 찾는 이들이다. 꿈꾸던 피난처래야 그저 잠시 잠깐이요 임시방편일 뿐임을 그들도 잘 알지만, 단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이 외로움을 이겨내고 슬픔을 잊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다. (130~131쪽)
토마스 만은 몇 번인가 사랑에 빠졌지만, 그가 여든 살까지 살았음을 감안한다면 별로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그는 사랑을 심하게 앓았다. 일흔다섯 살의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또다시 이것이, 또다시 사랑이, 사람에게 온통 사로잡히는 일이, 그를 향한 깊은 열망이―아무 일 없이 25년이 지났는데, 이제 또다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랬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사랑과 동경은 불완전한 인식에서 기인하리라는 생각만큼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클라이스트의 『암피트리온』에 대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어떤 가치 때문에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다.” 사랑은 모든 가치에 앞서는, “가치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201쪽)
카프카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프라하라는 독특한 정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며, 우선적으로 이러한 정황 및 거기 사는 유대인들에만 연관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밀려난 존재들, 비난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향과 소외에 대한 탁월한 비유인 것이 입증되었다. 말하자면, 카프카가 묘사한 유대인의 비극은 후세의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인간 실존의 극단적 예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219쪽)
그의 첫사랑은 옛 오스트리아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로트는 20년대의 정처 없는 지식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하여 왼쪽으로, 베를린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사랑을 잃고 사회주의와 바람이 났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이 낙담한 오스트리아인, 좌절한 사회주의자, 약속의 땅을 찾는 유대인에게 무엇이 남았겠는가? 어쩌면 독일? 로트는 몇 년쯤 줄곧 그렇게 믿었고, 그러길 희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해, 그는 자신의 나라는 “무국(無國)”이라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고향은 독일어 하나뿐이라고 썼다. 로트, 이 절망에 빠진 인생의 향락자는 술을 위안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온갖 기행(奇行)과 우행(愚行)도 낙으로 삼아, 별별 배역과 가면을 다 뒤집어썼다. 그의 주변 사람 누구도 어디까지가 연극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247~248쪽)
모든 작품에서 그는 우리, 곧 시민사회의 교양 있는 지식인들을 다루었다. 우리의 속내를 간파하고 통찰했다. 우리가 느끼고 예감하고 생각했으되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내 보여주었으니, 이 점에서 프리슈는 동시대 작가들을 압도했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모두가 문학에서 구하는 것을 찾았으니, 즉 우리의 고통이다.
젊은 독자들과 미래 세대들은 막스 프리슈의 소설과 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으리라.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지식인이란 남자들이, 어떻게 여자를 사랑했으며,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했는지를. (283쪽)
작가 베른하르트는 우리 존재의 가장 어두운 영역들에 매료되었는데, 바로 거기서―그리고 오직 거기서만―삶의 결정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베른하르트는 자기 주변 세계에 항거했고, 그럼으로써 온 세상에 저항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의 작품은 끊임없는 항명이며, 끝없는 반란이다. 그러나 우리 실존의 무의미성에 저항한 이 불같이 맹렬한 항거에는 어쩌자는 계획도, 아무 목적도 없었고, 그저 그 자체로 그는 족했다.
베른하르트는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문학으로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털끝만큼이라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견해 따위를, 그는 어리석고 유치하게 여겼다. 과격한 사회비판가였으나, 다만 ‘반항을 위한 반항’에 몸을 바친 이였다. 그는 죽음의 작가로 시작해,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살았다. (333~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