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해
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
공정무역, 지속가능성, 그린 디자인…… 요즘 들어 부쩍 귀에 자주 들리는 단어들이다. 자본주의 산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저개발 지역과 고도성장한 지역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져 지구촌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풍족한 물자가 결국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로 버려지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인 세상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이 환경과 사회와 경제를 해치지 않으면서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고, 좀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정당한 대가로 저개발 지역의 노동력을 이용해 윤리적으로 올바른 상품을 생산하자는 공정무역 운동이다.
런던은 ‘디자인 시티’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감각의 디자이너들이 포진해 있고 시 자체에서도 디자인에 크게 투자하는 도시다. 이 첨단 디자인의 도시 런던에서 공정무역과 디자이너-메이커 운동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디자이너-메이커란, 과거에는 디자인과 제조가 분리되어 있어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를, 업체는 그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대량생산을 했다면, 이제는 디자이너 스스로가 제작자가 되어 다품종 소량의 상품 제작에 직접 관여하는 이들을 말한다. 디자이너들 스스로가 소규모의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이는 디자인 학교에서 디자이너가 과잉 배출되면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젊은 디자이너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탈출구가 절묘하게 맞닿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런던은 유럽 중에서도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비즈니스가 가장 활발한 도시라고 한다. 런던에서 눈에 띄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공정무역 상품으로 한국 소비자들도 익숙한 커피(요즘은 스타벅스 같은 대형 커피 브랜드들도 공정무역을 표방할 정도다)에서부터 옷이나 장신구 같은 패션 아이템들까지 공정무역 상품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둘째는 재활용이다. 리사이클이 이미 생산된 물건을 전문 업체에서 화학 처리를 통해 원료 상태로 돌린 다음 재사용하는 것을 말한다면, 업사이클은 물리적으로 물건의 형태와 쓰임새를 바꾸어 가치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디자이너-메이커로, 이전까지 디자인이 대량생산을 전제로 했다면 최근 두드러지는 경향은 디자이너들이 다품종 소량의 상품 제조에 직접 뛰어든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소규모 사업자들이다. 이는 사실 세 번째 경향인 디자이너-메이커와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맥을 같이하는 움직임이다. 다섯째는 공유경제다. 쉽게 말하면 물건을 소유하는 대신 필요할 때만 빌려 쓸 수 있는 대여제도로 효용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 사업체의 소유와 운영을 조합원들과 공유하는 협동조합도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비단 런던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런던에서 좀 더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 한국에서도 그 움직임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들이다. 당장 포털 사이트에 ‘공정무역’이라는 키워드를 쳐 넣으면 공정무역 상품들을 파는 사이트들이 여럿 검색되고, 젊은 디자이너-메이커들이 스스로 만든 물건을 직접 판매하는 장터도 운영되고 있다. 협동조합은 최근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활성화되고 있다. 지은이는 런던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 먼저, 더 활발히 일어난 이유가 “더 많은 실패를 더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선배 격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 책은 런던에서 소위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공정무역, 리사이클과 업사이클, 디자이너-메이커, 협동조합)를 하는 13인의 젊은 디자이너-메이커 그리고 협동조합 설립자를 만나 이들이 하는 작업을 소개하고 이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는 자리다.
1. 공정무역
사피아 미니가 이끄는 ‘피플 트리’는 공정무역 패션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특이하게도 ‘피플 트리’는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어 자리를 잡은 후 영국에 2001년 설립한 경우로, 그전까지 황무지 같았던 공정무역 패션 시장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영국 여왕에게서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았다. 피플 트리의 공정무역 패션에서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예쁘다’는 것이다. 공정무역 패션은 촌스럽다는 편견을 깨고 비비안 웨스트우드, 쓰모리 지사토, 올라 카일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의 협업(혹은 재능기부)을 통해 윤리적으로도 올바르고 패셔너블한 공정무역 패션 브랜드를 이뤘다. 이 브랜드는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에마 왓슨 같은 배우가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해 화제를 모았다. 피플 트리를 이끄는 사피아 미니는 이런 식의 협업과 재능기부를 통해 공정무역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피파 스몰은 ‘윤리적인 금’ 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주얼리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윤리적인 금이란 채굴 과정에서 유독성 화학물질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광부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생산한 금을 말한다. 피파 스몰은 공정무역 금을 사용할 뿐 아니라 세공 또한 현지에서 함으로써 공정무역 제작자들의 수익을 높이려고 한다. 원료를 판매하는 것보다 가공, 즉 디자인된 상품으로 판매할 때 부가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원래 인류학을 전공한 그녀는 아프리카 부족민들의 전통 공예품을 디자인 상품으로 개발하는가 하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 르완다의 피그미족 등 소수 부족들과 함께 몇 년씩 거주하면서 그들에게 장신구 제작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카마’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아프리카 말라위 노동자들과의 공정무역을 통해 가방을 만드는 일레인 버크는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올림픽의 상업성과 부조리함을 비꼬는 문구를 넣은 토트백을 만들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올림픽 로고는 없이 런던올림픽 대표 색상과 ‘출근하는 데 세 시간 걸렸다’ ‘그들은 스테로이드에 취해 있다’ 같은 재치 있는 문구만으로 만든 이 가방들은 올림픽이 개막하기도 전에 전량 매진되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렇게 ‘세상의 모순에 대해 눈 감지 않고 똑바로 할 말을 하는 것’이 공정무역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카마’의 가방들은 전량 말라위에서 제작되는데, 이곳은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서 가방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하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곳이다. 아무리 공정무역이라지만 이렇게 기반이 부족한 곳과 일하려면 장애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말라위 노동자들과 일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동화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리스 호튼은 우연한 기회에 재능기부를 통해 공정무역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는 네팔의 공정무역 생산자 단체 KTS와의 협업으로 양탄자를 생산하는 업체 ‘메이드 바이 노드’를 세웠다. 양탄자는 네팔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업으로 KTS 또한 훌륭한 품질의 수공품 양탄자를 생산했지만 촌스러운 디자인으로 시장 반응이 좋지 않았다. 크리스 호튼은 자신의 그림책 캐릭터를 양탄자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생산 공정을 디지털로 단순화해서 쉽게 디자인 원본과 같은 양탄자를 생산할 수 있게 했다. 2013년 8월에는 18명의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를 참여시켜 각각 개성을 담아 양탄자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KTS에서 생산해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그가 공정무역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는 공정무역으로 제작되는 많은 수공품이 아름답지도 않고 쓸모도 없어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좋은 디자인은 공정무역 제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여기에 공정무역의 성패가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
2. 리사이클과 업사이클
재활용은 어떤 이에게는 쓰레기 처리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떠오르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래번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래번은 2008년 런던 패션위크에 버려진 군복을 이용해 만든 외투로 데뷔했다. 그는 오래된 군복들을 해체해 일반인을 위한 외투로 업사이클링 했는데 이게 성공을 거두자 이번에는 ‘원 어게인(Worn Again)’이라는 영국의 비영리조직에서 폐기된 낙하산을 재활용해보자고 제안했다. 이걸로는 윈드브레이커, 일명 ‘바람막이’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이 ‘재활용’ 옷들은 세계 각 도시의 유명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
‘이스트 런던 퍼니처’는 크리스천 딜런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맺어진 집단으로, 임대가 안 된 상업공간을 실험적인 성격의 개인이나 단체에 무료 임대하는 공공사업의 도움으로 공간을 얻어 그곳에서 화물 적재용 목재 받침대인 팰럿을 이용해 가구를 만든다. 이들이 팰럿을 이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재활용을 통해 환경에 이바지하자는 의도에서만은 아니다. 공짜로 재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료로 임대한 공간과 무료로 얻은 재료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스트 런던 퍼니처가 수입을 얻는 주요 통로는 업체들이 제작 주문한 가구를 위해서다. 특히 이벤트나 축제 등 일회성 행사에 사용할 가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회성 행사이기 때문에 재활용품으로 만든 가구를 쓰면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셈이다.
루퍼트 블랜차드와 멜로디 로즈는 버려진 물건에 새 생명을 부여한다. 루퍼트는 버려져서 짝을 잃은 서랍들을 모아 서랍장을 만드는데, 하나의 서랍장에 같은 서랍이 하나도 없지만 그 덕분에 더욱 멋스러운 서랍장이 완성된다. 이 서랍장으로 그는 『텔레그래프』와 『엘르』가 주관하는 ‘브리티시 디자인 상’에서 2011년 ‘올해의 제품 디자이너’로 꼽히기도 했다. 루퍼트의 업사이클링 대상이 서랍이라면 멜로디는 도자기다. 그녀는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낡은 도자기를 새로 장식하고 다시 구워서 새 생명을 준다.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물건을 다시 사랑받게 하고 싶어서다. 그녀가 선택하는 도자기들은 대체로 클래식한 생김새를 가졌는데 거기에 새로 덧붙여진 장식은 모던한 그래픽이다. 이런 묘한 부조화가 그녀의 도자기를 더욱 멋스럽게 만든다.
3. 디자이너-메이커(소규모 사업자)
실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을 넓게 보아 ‘디자이너-메이커’이자 소규모 사업자라고도 부를 수 있다. 오히려 이 분류에 들어 있는 이들은 ‘디자이너’라는 일반적인 카테고리에 속하기 힘든 이들이다. 알렉스 비숍은 수작업으로 ‘집시 기타’를 만드는 현대판 ‘장인’이자 기타 연주가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메이커들이 모여 있는 뎃퍼드 가의 한 스튜디오에서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기타를 만들어내는 알렉스는 스스로가 장인이라는 의식 같은 건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 쓸 기타가 필요했고 또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수많은 디자이너, 공예가들을 배출해내는 현대의 대학 시스템에서, 모두가 대형 디자인 회사의 직원이 되어 승진을 거듭하며 살아남기는 힘들다. 알렉스는 요즘 젊은 디자이너, 공예가의 상황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한편 ‘수그루’를 창립한 제인 니 굴퀸틱은 ‘어떤 물건이든 자기 필요에 맞춰 쓸 수 있게 하자’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꽤 성공적인 업체를 키워낸 경우다. 욕조 마개가 없어져서 대체할 뚜껑을 쉽게 구하지 못해 곤란한 경험이 있던 그녀가, 말하자면 쉽게 ‘수리’할 수 있는 용도의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 출발이다. 수많은 물건들이 대량생산되어 쉽게 버려지는 세상에서, 수그루는 물건과 사용자 사이에 일종의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매개체다. 그저 버려질 뻔했던 손상된 물건이 수그루를 통해 쉽게 고쳐지고 필요에 맞게 변형됨으로써 그 물건은 ‘나만의 특별한 물건’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먹을거리도 ‘디자인’될 수 있을까? 이제 소개하는 에빈 오라오다인의 커널 맥주와 닐 맥레난의 ‘클린 빈 토푸’는 분명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커널 브루어리는 맥주를 빚는 20여 단계 공정에 기계를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런 수작업으로 생산한 맥주 10여 종 가운데 ‘엑스포트 스타우트’가 2011년 런던 최고의 맥주로 선정되었다. ‘디자인’ 맥주라고 하지만 맥주병이 화려한 레이블로 포장된 것도 아니다. 그저 ‘커널’이라는 이름과 맥주의 종류만이 찍혀 있을 뿐이다. 여전히 세 명의 직원이 만들어내는 커널 맥주는 맛을 획일화시키는 대형 양조업체에 맞서 잃어버린 맥주의 맛을 하나씩 되살리면서 풍부한 맛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닐 맥레난은 런던 한복판에서 홀로 두부를 만들어낸다. 외모는 전형적인 백인인 그는 그저 중국 여행 중에 두부의 맛에 반해 이 일을 시작했다. 런던에서 판매되는 대개의 두부는 식감이 단단하고 거칠다. 서양인 대부분이 두부 특유의 말캉말캉한 식감에 적응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두부 ‘본래의 맛’을 구현해내기 위해 애쓰고 그 맛을 전파시키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1년에 한두 달씩 중국 남부 농가에 머무르며 두부의 맛을 연구한다는 그는 가까운 곳에서 신선하고 건강한 식품(그의 경우에는 두부)을 구할 수 있느냐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두부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4. 협동조합
마지막으로 소개할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는 협동조합의 형태다. 한국에서도 재래시장은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지만 이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도시가 발달한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덕분에 우리는 장을 보기 위해서는 차를 몰고 대형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식량을 바리바리 사서 트렁크에 채워 넣고는 다시 냉동실에 꽉꽉 재어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피플스 슈퍼마켓은 기업형 슈퍼마켓의 폭주를 막고자 소비자들이 뭉쳐 만든 슈퍼마켓이다. 회원들은 매년 회비를 내고 정기 총회에 참석해 입점할 물건을 투표를 통해 스스로 정할 권리와 물건 구매 시 10퍼센트의 할인을 받을 권리를 얻는다. 물론 의무도 있다. 한 달에 네 시간씩 짬을 내어 자원봉사로 근무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두가 경영과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이 슈퍼마켓은 덕분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되거나 불필요한 물건을 사게 되지 않는다. 물건 종류는 다양하지 않아도 필요한 건 다 구비돼 있고 가격은 기업형 슈퍼마켓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을 만큼 저렴하다. 농산물은 런던 근교에서 생산된 것을 가져다 판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농산물은 슈퍼마켓 내 주방해서 조리해 포장 판매하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슈퍼의 수익을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슈퍼마켓은 꽤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영국 전역에서 이 모델을 본뜬 슈퍼마켓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