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됭의 기이한 악마 사건과 ‘타자성’의 발현
17세기 프랑스 남부 루됭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에서 어느 날 수녀들이 몸을 뒤틀고 비명을 지르는 등 악마에 사로잡히는 증상을 보인다. 사건을 해결하고자 찾아온 당대 권력자 리슐리외의 특사 로바르드몽, 마법사로 지목된 가톨릭 사제 위르벵 그랑디에, 마귀들린 여인에서 성녀로 거듭나는 원장수녀 잔 데장주, 구마사로 왔다가 정작 자신이 악마에 사로잡히고 만 쉬랭 신부. 이들이 이 역사적 무대의 주인공들이다.
루됭에서 일어난 희대의 악마 사건을 세르토는 이렇게 요약한다.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고, 확실과 불확실에 대한, 이성에 대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권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거대한 공개 재판장이자…… 프랑스의 호사가들은 물론 거의 전 유럽의 관심이 쏠리는 ‘연극의 무대’, 신사들의 즐거움을 위한 서커스였다."(12쪽)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수세기가 지난 현대에 와서도 식지 않았는데,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루됭의 악마들](1952)과 이를 각색한 켄 러셀의 영화 <악마들>(1971), 예르지 카발레로비치의 영화 <잔 데장주 수녀>(1961),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오페라 <루됭의 악마들>(1968~69)이 모두 루됭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세르토는 당대의 희귀한 고문서들, 편지들, 소책자들을 면밀히 조사해 마치 르포르타주처럼 사건을 재구성해 들려준다. 하지만 세르토가 보는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판관도 해설자도 아니다. 이는 책의 서론 격인 「역사는 결코 확실한 법이 없다」에서 잘 드러난다.
"악마의 발현이라는 위기 상황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이 위기는 한 문화의 균형이 깨졌음을 폭로하는 한편 그 변화 과정을 가속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한 사회가 기존의 확실성을 잃어가고 새로운 확실성을 만들려 하는 와중에 이 확실성들과 대면하는 과정이다. 모든 안정성은 불안정한 균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균형을 더 안정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은 이 균형을 교란한다. 특정한 사회 체제에서 마녀 사건과 마귀들림 사건은 어떤 균열이 갑자기 난폭하고 극적인 형태로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1쪽)
또한 마지막 장 「타자의 형상들」에서 세르토는 이렇게 단언한다. “누가, 누구에게 마귀들렸는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마귀들림에는 ‘진실한’ 역사적 설명이 없다.”(383쪽)
세르토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마귀들림이 실제로 있어났는지, 아니면 한 편의 기막힌 연극이었는지가 아니다. 세르토는 그것이 사실이었든 아니든, 마귀들림 현상 자체를 위기의 징후로 본다. 그것은 사회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난 심각한 균열의 발현이며, 그 균열은 ‘타자’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악마(마귀)라는 이름의 타자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다음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이상한 것들은 보통 우리 발밑에서 은밀히 돌아다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기만 하면 이들은 홍수라도 난 것처럼 곳곳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하수구 뚜껑을 들어올리고 지하실에 스며들며 급기야는 시가지를 침범한다. 야음夜陰의 존재가 난폭하게 백주대낮으로 밀려오는 것은 낮의 주민들에게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하의 삶이, 뿌리 뽑을 수 없는 내부 저항이 드러난다. 사회를 위협하는 어떤 힘이 덮칠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다가 사회의 긴장 상황을 틈타 잠입하는 것이다. 별안간 이 힘이 긴장을 가중시킨다. 그 힘은 사회의 장치와 통로를 이용하는데, 이때 이 장치와 통로는 어떤 ‘불안’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서 오는 예기치 못한 불안이다. 그 힘은 울타리를 부수고 사회의 배수로를 범람하고 길을 뚫는다. 나중에 물이 빠지면 그 길 끝에는 다른 풍경,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9쪽)
세르토가 루됭 사건의 최후 승자로 꼽는 사람은 잔 데장주 원장수녀다. 잔 데장주는 마귀들린 여인들의 대변자, 타자의 목소리의 대표자이다. 잔 데장주는 구마의식 과정에서 그랑디에 신부를 마법사로 지목하고, 쉬랭 신부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되고 나서는 성녀와 같은 존재로 추앙받으며 프랑스 전역을 순회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치유한 쉬랭 신부는 마귀에 들리고 만다. 세르토는 원장수녀가 사건 과정에서 보이는 진술, 행동, 연극(놀이)을 타자가 주체를 전복하는 효과적인 ‘전술’로 파악한다. 세르토는 [일상의 발명 1―실행의 기술](1980)에서 전략과 전술을 구별하면서, 전략은 기존 질서 아래서 권력자가 행사하는 계산된 권력관계의 발현이며, 전술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해 기존 질서의 부재를 드러내는 계산된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에 쉬랭이 마귀에 들렸다는 사실은 곧 쉬랭이 자아를 상실하고 타자를 자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쉬랭은 신비적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것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쉬랭과 잔 데장주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의 확장이다. 이처럼 억압되었던 것들을 드러내고,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려는 노력이 곧 세르토가 새롭게 규정하는 역사학이다. 정신분석학을 흡수하며 세르토가 역사 서술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것은 ‘프로이트로의 귀환’, ‘피억압자로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