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듣는 밤의 낭만을 아이들에게 되돌려 줄 동화
맛깔스러운 언어로 생태적인 세계를 그려온 이상권 작가의 신작 동화가 나왔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이야기 한 가지만 더’를 외치던, 다른 나라 얘기 같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경험담을 듣던 유년의 한적한 밤은 어디로 갔을까? 『이야기 전성시대』는 방학을 맞이해 시골에 놀러온 손주들을 위해 할머니가 자신이 겪고 들었거나, 전해져 오는 것들을 들려주는 동화다. 이 안에는 한 사람의 인생 역사, 동네의 전설, 작은 생명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테마별로 빼곡하게 들어 있다. 할머니의 친근한 말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어른들의 질박한 삶 속에 숨어 있는 지혜와 재미들이 마음속으로 하나씩 찾아온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모은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점점 사라져 가는 구전 문화를 복원해 내고, 이야기가 ‘전성시대’를 누리던 때를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 이런 이야기는 『귀신 전성시대』라는 서로 연결된 책으로도 만날 수 있다.
그때 우리 마을엔 흥겨운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본인이기도 한 주인공 목남이는, 씩씩하고 당찬 성격이다. 밤길도 무서워하지 않고, 남자 애들만큼 수영도 잘하는 여자 대장부다. 지금으로부터 칠팔십여 년 전, 시대가 만들어 놓은 여자아이라는 편견 때문에 좌절할 때도 있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며 살아갈 날을 기다린다. 지천을 누비며 자연 속에서 뛰놀고 생명과 호흡하는 목남이에겐 많은 친구들과 여러 사건들이 항상 함께한다.
지금보다 자연과 더 가까웠던, 이웃사촌과 더 친밀했던 시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목남이는 동물들과도 친구 맺고 지낸다. 뱀을 구해 준 일 때문에 목남이가 종다리들이랑 원수졌다가 화해한 일, 몽유병 덕분에 목남이와 순님이의 목숨을 구한 사연, 동물 조상 때문에 가문끼리 싸웠던 일, 울타리를 무너뜨린 통일 호박……. 때로는 눈물 나고 때로는 웃음 나는 목남이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때의 사람들, 그때의 마을에 마음이 가 있다. 이 책은 숱하게 많은 생명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재미를 보여준다.
이야기를 읽는 것은 온기를 주고받는 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상권 작가의 눈에 그려진 그 시대는 지금보다 더 야생적이고, 투박했지만 모든 일을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재미와 생명력이 있던 때였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그 시절 이야기는 요즘 아이들에겐 어쩌면 판타지에 가깝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여기에 화자의 해석과, 청자의 흥미를 돋우는 허구적인 요소가 버무려져 있다. 목남이가 동물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른과 아이, 아이와 아이 사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이다. 그런 문화가 사라지는 동안, 혹시 우리는 내 곁의 존재들에게 눈길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소중한 마음까지 잃어버린 건 아닐까? 이 책들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이러한 ‘관계성’에 대해 책 안팎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웃들과 기쁨, 슬픔을 나누는 공감의 능력과 자연의 일부로서의 겸허한 인간다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피워 냈던 우리 어른들의 정신적 유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사고방식을 유지한 채 단지 작품의 배경만 과거로 돌린 작품들과는 깊이가 다르다. 『이야기 전성시대』는 말하는 이의 눈을 마주 보고, 함께 듣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며 이야기에 집중하는 동안 상상력이 최고조에 이르러 더 이상 텔레비전도 스마트폰도 생각나지 않을 밤을 재현한다. 풍성한 이야기 잔치 속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전성시대를 만나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