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산다화』 『사고루 기담』 등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단편집과 『칼에 지다』 『창궁의 묘성』 등의 대작 시대소설로 국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아사다 지로의 새로운 번역작.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는 단편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특유의 유머와 감성뿐 아니라 시대소설의 중후함도 함께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집이다. 메이지 시대 초기, 사회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무사들의 모습을 그린 여섯 편의 단편에서 시공을 뛰어넘은 감동과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때는 1800년대 후반, 메이지 유신의 파도가 지나간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수도 에도가 도쿄로 이름이 바뀌고 막부 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그간 일본 사회를 지탱해온 수많은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다. 어떤 이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발 빠르게 장사수단을 찾아 돈을 벌어들이거나 신정부에 자리를 얻어 관료가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명을 위해 은둔한다. 낡은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버리고 하릴없이 새 삶을 찾아 고군분투해야 했던 사람들의 각종 일화가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서글프고 비장하게 그려진다.
썩 멀지 않은 옛날, 갑자기 눈앞을 막아선 근대의 울타리 앞에서
주저하고 당황하면서도 어쨌든 그것을 넘어섰던 사람들의 이야기
표제작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는 원래 무가 중심이었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무사들의 ‘뒷마무리’, 즉 현대로 따지자면 정리해고 업무를 맡게 된 이와이 고로지라는 남자의 여생을 그의 손자가 훗날 노인이 되어 자신의 손자에게 들려주는 내용이다. 옛 동료들의 원망과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고로지는 이윽고 한때 무가의 일원이었던 이와이 가문도 정리하러 나선다. 마지막 핏줄인 어린 손자를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데려다주고 자신의 죽을 곳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그에게 생각지 못한 옛 인연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순수하고도 어른스러운 소년의 눈길과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담담한 말투를 통해 변해가는 시대를 향한 서글픔이 그려진다.
그 외의 단편에서도 지금껏 살아온 모습과 사회적 위치, 나이와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서 소외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사내들이 등장한다. 무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상점 심부름꾼으로 키워지는 소년(「동백사로 가는 길」), 기억도 희미한 옛 전투에서 적병에게 써주었던 목숨값 증서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말단 관리(「하코다테 증서」), 호위 무사였던 자신의 눈앞에서 참변을 당한 옛 주인의 복수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내(「석류고갯길의 복수」), 신정부에서 느닷없이 서양력을 채택하는 바람에 낙향할 신세에 처한 옛 천문방 과학자(「서쪽을 보는 무사」), 1초 단위로 쉴새없이 움직이는 서양 시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지각과 실수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육군 장교(「먼 포성」) 등. 의식주뿐 아니라 시간의 단위와 날짜 세기까지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너무나도 빠르고 다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해나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의 영광과 긍지를 가슴 한편에 남겨두고서.
지나간 시절을 품은 채 새 세상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우습고, 서글프고, 때때로 비장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들의 제자리걸음(혹은 몸부림) 뒤에 웅크린 것을 이내 알아본다. 이들이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것은 옛 시절의 향수도 낡은 가치관도 아니었다.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어 어디로 흘러가건 간직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스스로에 대한 ‘긍지’였다. 올곧고 마음 따뜻한 이들은 다소 느릴지언정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를 가로지르는 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인생은 결코 허름하거나 누추하지 않다.
_「옮긴이의 말」에서
국내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할 시대배경이지만, 희대의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처럼 어떤 주제로든 보편적이고 가슴 찡한 감동을 자아내는 아사다 지로의 저력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역사책이나 사료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그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이 책만의 매력이다. 시대와 공간은 동떨어져 있지만 하루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세상을 아슬아슬하게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인이 항시 느끼고 있는 위기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그다지 멀지는 않은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일본 아마존 독자평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며 모든 가치관이 일변했다는 사실은 물론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 특히 무사들이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헤쳐나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앞으로의 미래에 또다시 이런 격변이 다가온다면 나는 그들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무언가를 지니고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 시대의 공기가 문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가혹한 운명을 진 주인공들과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나 자신을 비추어보았을 때, 물질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뒤에서 낡은 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에 주목한 작가의 혜안 덕분에, 스스로의 막을 내리고 뒷마무리를 결행한 마지막 무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