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교황’이 남긴 우리 시대의 회고록
2013년 9월 18일, 독일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은 물론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 일제히 그의 죽음을 알렸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애도 성명을 발표했으며, 9월 26일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생전에 그는 ‘문학의 교황’이라 불렸다. 독일 문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나면 그가 내릴 ‘평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의 혹평을 읽고 몸서리치며 분노한 작가가 부지기수였다. 아무리 가까운 동료 작가라도 작품이 시원찮으면 그의 예봉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보다 적이 많았다.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간 무려 8만 권이 넘는 책을 비평했지만, 그의 장례식에 독일 작가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은 그렇게 권좌에서 내려와 자신의 유일한 고향이자 안식처인 ‘문학’으로 돌아갔다. 이 책 『나의 인생』(원제 Mein Leben, 1999)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개인이 남긴 유일한 자서전이자 20세기의 비극을 돌아보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회고록이다.
20세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언하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상 1~2부가 한데 묶이고, 3~5부가 나머지 한 묶음을 이룬다. 자서전인 만큼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만 전반부는 ‘역사’에, 후반부는 ‘문학’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단연 압도적인 것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전반부다. 1999년 출간된 이후 이 책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문학평론가의 자서전이 자국에서 120만 부가 넘게 팔리고 15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이 개인적 삶의 기록으로 그치지 않은 이유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가운데 하나를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가슴 아프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지난 20세기에 인류가 스스로에게 저지른 가장 잔혹한 범죄의 실상과 그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자서전은 개인의 삶이 한 시대의 역사와 곧바로 치환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 인간이 반성할 줄 모르고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한, 이 책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읽힐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이었다. 차가운 두려움 속에서도 유대인 젊은이들은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얼마 남지 않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사랑하다 끝내 트레블링카행 열차에 실려가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라이히라니츠키에게 그 사랑은 가족의 목숨과 그만큼이나 소중했던 자신의 꿈을 아무렇지 않게 앗아가고 짓밟은 나라, 바로 독일의 언어와 문학이었다.
문학만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사람
이 책의 후반부는 문학평론가 라이히라니츠키의 독일문학에 대한 사랑 고백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는 문학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한 인간의 생존을 향한 고군분투와 문학을 향한 열정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라이히라니츠키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로 망명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그에게 귄터 그라스는 도대체 당신은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절반은 폴란드인, 절반은 독일인, 그리고 온전한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문학 말고는 고향이랄 것이 없었다. 시인 파울 첼란 이야기한 “공중 무덤”(「죽음의 푸가」)이 라이히라니츠키에게는 바로 문학이었던 셈이다.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 평생을 독학자로 살았다. 대학 강의실에는 학생이 아니라 교수의 신분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애매모호함이었다. 그는 평론에서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다.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가에게는 물불 가리지 않고 혹평을 쏟아냈다.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디 차이트』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라는 유력 언론은 그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공영방송의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는 그를 독일을 대표하는 스타 평론가로 만들어주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명료한 평론 덕분에 그는 수많은 작가들과 싸워야 했지만, 일반 독자들은 그 덕분에 문학과의 간극을 좁힐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독일 문단에서 황제와도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평론에서만큼은 작가의 명성과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독서 대중에 대한 깊은 애정 덕분이었다.
이 책이 계속 읽히는 이유
2013년 그가 타계하면서 이 책은 다시 한번 독일 독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2009년에는 이스라엘 영화감독 드로르 자하비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2002년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생생하게 그려진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실상과,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도 문학을 향한 꿈을 버리지 않은 한 아름다운 영혼의 이야기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잔잔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키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한 문제적 인간이 겪은 현대사의 비극과 그의 문학적인 삶이 교차하며 엮어내는 보기 드문 드라마를 감상하는 일일 것이다. 2012년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Tag des Gedenkens an die Opfer des Nationalsozialismus)에 라이히라니츠키는 유대인을 대표하여 노구를 이끌고 독일 연방의회에서 연설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는 유대인이라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지만, 끊임없이 그 운명을 극복하려 노력하며 그 누구보다 당당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갔다.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가 계속하여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본문 속으로
내가 특별히 즐겨 추억하는 반 아이가 있다. 인정이 있는 아이였고 유대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어느덧 의사가 되어 있던 그가 들려주길, 1940년 베를린의 슈테틴 역 근처에서 경찰의 감시하에 끌려가던 유대인들 틈에서 옛 동급생 T를 보았다는 것이다. 몰골이 초췌했다고 했다. “그때 생각했지. 나한테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는 게 그 아이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거라고. 나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얼른 외면해버렸어.”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아이처럼 우리를 외면했다. (73쪽)
1937년 그때만 해도 나는 토마스 만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국제사회에서 독일 작가로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큰 역할을 해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봐도 확실한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20세기의 독일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독일, 그건 내 눈에 아돌프 히틀러와 토마스 만이다. 두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양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상징한다. 만일 독일이 이 두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망각하거나 배제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치명적인 결과가 뒤따를 것이다. (93쪽)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명의 유대인 청소년은 그때 ‘제3제국’에서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 미래를 우리는 단 한순간도 진지하게 신뢰하지 않았지. 그때 유대인이 어떻게 배우가 되고 어떻게 평론가가 될 수 있었겠어? 하지만 우리는 그 호사를 누렸어. 연극과 문학이 있는 삶을 꿈꿨잖아. 그때 우리를 이어준 것은 아마 우리의 꿈이었을 거야.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꿈이 정말 실현됐어. 우리 민족이 학살되는 와중에도 우리는 무사했어. 맞아 죽지도, 살해되지도, 전멸되지도, 가스실에서 죽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살아남았어. 그건 순전히 우연이야. 우린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아비규환에서 선택된 아이들이지. 우리는 표식을 단 사람들이야. 마지막 죽는 날까지 우리는 그 표식을 지니고 살아가겠지. 넌 그거 알고 있니?” “그래,” 내가 말했다. “잘 알고 있고말고.” (135쪽)
거의가 그랬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독일 병사들은 누구나 바르샤바에서 유대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하거나, 바지에 용변을 보게 하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할 수도 있었다. 느닷없이 총을 쏘아 죽이거나 천천히 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도 상관없었다. 유대인 여자에게 옷을 벗게 하여 그 속옷으로 도로 포장석을 닦게 한 뒤 만인이 보는 데서 소변을 보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독일인들이 이런 장난을 치며 느끼는 즐거움을 망쳐놓지 못했고, 아무도 유대인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독일인들을 막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타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이 주어질 때 이들이 어떤 짓까지 자행할 수 있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167~168쪽)
벌써 거리로 나왔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하지만 그때 주고받은 말은 몇 마디밖에 되지 않았다. “바르샤바에 계속 있을 거니?” “네.” “정치가 정말 네 천직이라고 생각해?” “네.” “너 실수하는 거야. 네가 있을 곳은 독일이지 폴란드가 아니야. 그리고 네 천직은 문학이지 정치가 아니야.” “문학은 직업이 아니라 저주예요.” “남의 말은 그만 인용해. 나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아니고 너도 토니오 크뢰거가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는데, 폴란드를 떠나……” 나는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 그러나 아주 먼 훗날에, 이 대화를 나눈 지 12년 만에. (175~176쪽)
별나게 생긴 짐 때문에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이올린, 클라리넷, 트럼펫, 심지어 첼로 같은 악기를 케이스에 넣어 들고 갔다. 교향악단 연주자들이었다. 나는 몇 시간에 걸쳐 마지막 ‘선별’을 기다리는 동안 그중 몇 사람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왜 악기를 들고 왔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거의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독일인들은 음악을 사랑하잖아요. 무슨 곡이라도 하나 들려주면 가스실로 안 보낼지도 모르니까요.”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음악가들 중 되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33쪽)
혹시 바르샤바에서 막 도착한 그 부부는 옷을 다 벗은 채 ‘호스’ 안을 걸어가고 있지나 않을까? 가스실로 가는 좁은 길을 그렇게 불렀다. 어쩌면 이미 가스실에 들어가 벌거벗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샤워실과 비슷하고 천장에 파이프관이 달린 그 가스실 말이다. 파이프에서 나오는 것은 물이 아니라 디젤기관이 뿜어내는 가스였다. 가스실로 밀려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질식하기까지는 약 30분이 걸렸다. 죽음의 공포가 덮친 그 마지막 순간에 죽어가던 사람들은 창자와 방광을 통제하지 못했다. 대부분 대변과 소변으로 더럽혀진 시신들은 재빨리 치워졌다. 바르샤바에서 온 다음 유대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238쪽)
우리를 내보내려고 할 때마다 게니아가 그를 설득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집에 있어야 해요. 오랫동안 함께 버텨왔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잘될 거예요.” 그러다 거꾸로 게니아가 인내심을 잃을 때마다 자신 있게 외친 사람은 볼렉이었다. “젠장, 우리는 해낼 수 있어. 빌어먹을 독일 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두 사람은 계속 보호자가 되어 우리를 숨겨주었고, 우리는 여전히 밤 시간을 이용해 수천 개비의 담배를 만들었으며, 나는 그 긴긴 밤마다 계속 사랑에 빠진 소녀, 젊은 왕자, 늙은 왕, 겨울 동화, 한여름 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59쪽)
내가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은 1945년 이후에도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되돌릴 수도 없는 결정이었다. 런던에서 나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국을 뜻하는 나의 성 라이히Reich가 영사 업무에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라이히라는 단어는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폴란드인이나 영국인도 그 뜻을 알고 있어서 금방 ‘제3제국’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 나는 이 문제로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아 곧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라니츠키라는 이름을 골랐다.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후에도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평생 동안. (291~292쪽)
폰타네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쓴 글을 최소한 상대방이 이해하는 것이다. 문장을 알기 쉽게 쓰려고 노력한 나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외래어 대신 거기에 상응하는 독일어를 찾아내려고 외래어 사전을 자주 이용했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듣게 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과장이나 강조를 한 적도 많다.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391~392쪽)
(…) 주제넘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여기에서 내 신념을 밝히고 싶다. 문학은 내 삶의 기쁨이다. 여러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내 견해, 그리고 잘못되고 빗나간 것까지 포함하여 내가 내린 모든 평가들 속에 그 신념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문학에 대한 사랑, 때론 섬뜩할 정도의 이 열정이 평론가인 나로 하여금 비평 활동을 하게 하고 내 직분을 다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다른 이들이 나 개인을 봐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하는 것도 이 사랑 덕분일지 모른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 (393쪽)
(…)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 가』를 쓰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고 카프카가 『심판』을 썼을 때, 그들은 자신의 소설이 사회를 개선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20세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을 창조했다. 나는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문학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단, 예술성을 포기하고 문학적 형식은 자신이 바라는 정치적 혹은 이념적 요구와 이미지를 포장하는 도구로만 이용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런 것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나는 여느 평론가들처럼 가르치고 교육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작가가 아니었다. 교육을 받아들이는 작가는 교육할 가치가 없다. 내가 염두에 둔 대상은 대중, 곧 독자였다. 간단히 말하겠다. 나는 독자에게 내가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책들이 왜 훌륭하고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독자에게 그 책들을 읽히고 싶었다. 나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내 평론들은―적어도 일반적으로는―내가 원했던 영향을 독자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지 않았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해야 했다. 내용은 어렵지만 중요한 책들을 소수의 사람들만 읽는 현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479~4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