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유명 미술관 코스는 이제 그만!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 리지엄Resort+Museum에서 힐링하다
유럽 여행을 가면 누구나 그 나라 문화유산의 보고인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게 마련이다. 한데 서양의 각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관들은 대부분 어디에 있을까? 루브르박물관, 영국박물관, 프라도 미술관…… 대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들은 관광객들로 북적여 명작에 눈도장 찍고 나면 금세 지쳐버리기 일쑤다. 이런 유명 미술관 말고 도심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공원이나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작품을 만날 수는 없을까?
지난해 5월,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평원에 ‘전원미술관’을 표방하고 개관한 한솔뮤지엄은 개관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은 “일본 나오시마의 지추미술관도 다녀왔지만 더 새롭고, 더 멋지다. 한국에 이런 근사한 미술관이 생겼으니 정말 반갑다. 계절마다 찾고 싶다”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모처럼 여유를 만끽했다”라고 입을 모았다(『헤럴드경제』 2013년 5월 27일자 기사 참고). 이런 호응은 미술관에 가는 목적이 더 이상 예술작품 감상뿐인 시대는 지났다는 방증일 테다. 주5일제 이후 주말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제 미술관 여행자들은 감상뿐 아니라 휴양 또한 누리고 싶어한다. 이런 흐름은 일찍이 유럽에서 시작돼 유럽의 각 도심 외곽에는 저마다의 개성과 양질의 소장품으로 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하는 미술관들이 발달해왔다.
『자연미술관을 걷다』는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한가로운 미술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자리한, 라인강 주변 자연미술관 12곳으로 안내한다. 현대미술가․평론가․독립 큐레이터 등 현대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화가 지난 10년간 직접 다닌 미술관 여행을 바탕으로, 여느 여행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밀 루트를 공개했다. 무엇보다 미술관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건축 콘셉트, 컬렉션의 특성,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주변 여행지 등을 충실히 담아 실제로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를 위한 내실 있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휴식과 명상을 누리게 할 아주 특별한 아트투어
예술과 자연, 건축이 하나된 라인강 미술관 12곳
그렇다면 왜 라인강 주변 미술관인가. 하이네의 시 「로렐라이」로 잘 알려진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시작해 독일·프랑스·벨기에 등 여러 나라들을 흐르지만 강줄기가 독일에 가장 길게 걸쳐 있어 그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의 라인강 유역은 많은 포도밭과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성들이 곳곳에 있어 관광 코스로도 유명하다.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을 잇는 라인강 하류에는 독특한 자연미술관들이 대거 밀집해 있다. 이를테면 독일의 소도시 노이스에 위치한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은 거대한 생태 공원 속에 들어선 갤러리 건물 열다섯 곳을 천천히 거닐면서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미술을 경험할 수 있어 ‘힐링 미술관’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또 한때 프리드리히 1세가 살았던 모일란트 궁전은 관리 소홀로 폐허가 되어 사라질 뻔했다가 20세기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제적 공공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한스 홀라인이 설계해 포스트모던 건축의 아이콘으로 찬사를 받는 압타이베르크 미술관, 19세기의 온천탕 호텔을 리모델링한 쿠어하우스 미술관, 상류층 남성들의 무도회장에서 현대미술을 위한 공공미술관으로 대변신을 이룬 아른험 현대미술관도 모두 라인강 줄기에 자리한다. 이렇게 라인강 지역 미술관은 저마다 건축적 특징과 색깔 있는 소장품, 나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모두 국립공원이나 초원, 혹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 미술과 자연, 건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 더욱 그 가치를 발하는 숨은 진주 같은 이 미술관들에서는 하늘, 공기, 숲을 느끼며 예술작품을 음미할 수 있다.
『자연미술관을 걷다』에 소개된 미술관 대부분은 유럽의 새로운 아트투어 루트로 주목받고 있는 ‘크로스아트CROSSART’에 속한다. 크로스아트는 라인강 하류에 위치한 지역미술관 열 곳을 묶어 새로운 문화 관광 루트로 개발하기 위해 독일과 네덜란드 두 나라가 진행(2003~06년)한 문화관광 협력 프로젝트다. 크로스아트에 참여한 미술관 열 곳 중, 네 곳(퓐다시 미술관·아른험 근대미술관·팔크호프 미술관·판 봄멜 판 담 미술관)은 네덜란드에 위치해 있고, 여섯 곳(쿠어하우스·모일란트 궁전미술관·빌헬름 렘브루크 미술관·카이저 빌헬름 미술관·압타이베르크 미술관·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은 독일에 위치해 있다. 아울러 이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산업유산의 재활용 사례를 성공적으로 보여준 촐페어라인 폐광 단지, 마당이 있는 도심 속 미술관을 표방하는 폴크방 미술관처럼 최근 유럽 미술관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곳들도 소개했다.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반 고흐의 작품이 272점이나 전시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나 서구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을 보여주는 K20․K21도 빠질 수 없다.
아주 매력적이지만 지면의 한계로 본문에서 다 다루지 못한 기타 유럽의 미술관과 국내의 대표적인 자연미술관들은 책 후반부에 부록으로 간단히 소개했다.
자연미술관이 표방하는 네 가지 가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소박하고 진솔한 아름다움”
라인강 자연미술관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미술관이 시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공공성’, 지역의 역사를 이어가는 ‘역사성’, 자연을 미술관의 품에 안으려는 ‘생태성’, 현대미술과 고전미술을 한자리에 전시해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시도하는 ‘크로스오버 전시’가 그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한국의 미술관들 또한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솔뮤지엄 오광수 관장은 개관 인사에서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때론 단절이 필요하다. 익숙한 것들과 멀어질 때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조경과 건축, 장소 특정적 예술작품이 함께 어우러진 미술관을 산책하며 휴식과 명상을 누려보자. 느림과 쉼표의 미술관에서는 나를, 작품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말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규모나 명성이 아니라 소박하고 진솔한 아름다움’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