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으로는 이례적으로 맨 부커 상 후보에 오른,
상실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
『사라진 것들』은 이십 년에 걸쳐 변해가는 한 도시를 배경으로 상실의 슬픔과 고독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 데뷔작으로는 이례적으로 맨 부커 상 후보에 오르며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캐서린 오플린은 이 첫 소설로 코스타 북 어워드 신인상과 브리티시 북 어워드 신인상을 잇따라 수상했고, 가디언 퍼스트 북 어워드, 오렌지 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은 독립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화려한 마케팅의 힘을 빌리진 않았지만 눈 밝은 이들의 입소문을 통해 독자와 평단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작가의 독특한 이력에서 탄생한 소설
이 작품의 매력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캐서린 오플린은 이 작품의 무대이기도 한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나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신문 가게를 드나들며 탐정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범죄가 예상되는 은행 앞에서 몇 시간이나 혼자 ‘잠복근무’를 하는 주인공 케이트의 모습은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서른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오플린은 교사, 공무원, 매표소 직원, 웹 에디터, 미스터리 쇼퍼, 우편집배원, 음반 매장 매니저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는데, 이 다채로운 이력이 창작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형 쇼핑몰에서 장시간 근무를 할 때, 그곳에는 글로 쓰고 싶게 만드는 소재가 무궁무진했어요. 최면에 걸린 듯 멍한 표정으로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들, 한밤중 텅 빈 쇼핑몰의 으스스한 느낌, 감시카메라에 포위당한 것 같은 공포, 직원과 쇼핑객으로서의 서로 다른 경험들, 쇼핑몰 아래에 잠든 공장터의 과거……” 틴달 스트리트 출판사 인터뷰
오플린은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이 기이함에 관해 계속 글을 썼지만 처음에는 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경비원들 사이에서 한밤중이면 감시카메라 화면에 어린 여자아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을 듣고 그 강렬한 이미지를 잊지 못해 이 작품을 구상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오플린은 대형 쇼핑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또하나의 등장인물”(타임스)로 실감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슬픔과 유머의 혼합이야말로 이 세계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다.” 벌프스 리브리스 인터뷰
오플린 소설의 또다른 특징은 “뭉클함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주는”(피플) 것이다. 『사라진 것들』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 연인, 친구, 희미해진 꿈과 추억 등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상실’이 등장한다. 오플린은 공들인 심리 묘사를 통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깊은 슬픔을 건드리는 한편, 우아한 농담을 구사해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어린 케이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시선을 통해 따뜻한 웃음을 전하는가 하면 쇼핑몰의 부조리한 일상을 코믹하게 풍자하기도 한다.
“슬픈 눈의 소녀. 언제나 누군가를 관찰하고 있었지.”
소설은 1984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한다. 케이트 미니는 탐정사무소 개업을 꿈꾸는 열 살 소녀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사실 케이트는 얼마 전 유일한 가족인 아빠를 잃었다. 케이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아빠가 사준 마지막 선물 『탐정이 되는 법』을 탐독하며 마을을 순찰하는 데 몰두한다. 친구라고는 근처 신문 가게의 스무 살 청년 에이드리언이 유일하다. 그런데 학교의 소문난 말썽꾼 테리사의 옆자리에 앉게 되면서, 케이트에게도 또래 친구가 생긴다. 케이트는 테리사의 남모르는 아픔을 알아채고 친구를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케이트의 사명감을 자극하는 또하나의 과제는 새로 생긴 쇼핑몰 그린 옥스다. 어쩐지 그곳에서 곧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자신의 직감을 증명하기 위해 에이드리언에게도 테리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원숭이 인형 미키와 함께 조용히 쇼핑몰 잠복근무를 시작한다.
"마치 엷은 공기중으로 사라진 것처럼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
그로부터 이십 년 후인 2003년, 그린 옥스 쇼핑몰의 음반 매장 매니저 리사는 세일 인파 속 꼬마를 바라보다 문득 어렸을 때 부모님의 신문 가게에 놀러오던 아이 케이트를 떠올린다. 케이트는 이십 년 전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리사의 친오빠 에이드리언이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오빠도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후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는 오빠 때문에 리사를 비롯한 남은 가족들의 삶도 무너져버렸다.
리사와 같은 쇼핑몰에서 일하는 경비원 커트는 몇 년 전 연인이 세상을 떠난 후 삶의 의욕을 잃었다. 십삼 년 째 똑같은 모습만 비추는 쇼핑몰 감시카메라 화면을 보는 것도 그의 무력감을 부채질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원숭이 인형을 든 여자아이가 화면에 나타나면서 그의 일상이 흔들린다. 출입 통제 구역에 서 있던 그 아이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커트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누군가가 절 보고 있어요. 하지만 결코 다가오진 않죠.”
얼마 후 리사는 출입 통제 구역에서 원숭이 인형을 하나 줍는다. 우연히 리사와 마주친 커트는 이 인형이 사라진 여자아이의 것임을 알아본다.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커트와 리사는 함께 아이를 찾아나선다. 얼마 후 감시카메라 화면에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면서 커트는 경악에 빠진다. 그 아이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동료들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지만 리사만은 그의 말을 믿어주고, 두 사람 사이에는 차츰 특별한 감정이 싹튼다.
그 무렵 쇼핑몰 주차장에서 한 남자가 자살을 한 채 발견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커트와 리사가 외면해온 고통스러운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책 속으로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은행에서 몇백 파운드씩 인출해갔다. 어느 젊은 커플은 옷가게 쇼핑백을 각자 대여섯 개씩 들고도 각각 백 파운드씩 인출하더니 다시 쪼르르 옷가게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쇼핑센터에 널리 퍼진 비현실적인 느낌에 한몫했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케이트의 앞으로 불쑥 끼어들며 시야를 방해할 뿐이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가끔 무섭기도 했다. 자신이 그린 옥스에서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_본문 28~29쪽
“넌 절대 성가시지도 않고, 이상한 애도 아니야. 넌 내 친구야. 오후에 나 혼자 그 가게에 있으면 아마 돌아버릴지도 몰라. 넌 다른 누구보다 멋져. 케이트, 난 널 존경한다고, 진심이야. 난 스물두 살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데도 안 가잖아. 넌 열 살인데도 네 비밀기지를 갖고 있고 언제나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는데다 이런저런 계획에 열심이잖아. 언제나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잖아. 넌 어른을 시체처럼 보이게 만드는 애야. 네가 몇 살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여든다섯 살이든 스물다섯 살이든 상관없이 네 친구가 됐을 거야. 너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애야. 자신감을 가져.” _본문 78~79쪽
그 정글짐은 이글루 모양으로 쇠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곳곳에 녹이 슬었고, 오늘같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빈 나사 구멍으로 바람이 말려들어가 관에서 음산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케이트는 그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이글루 한가운데로 들어가 거꾸로 매달렸다. 머리카락이 붉은 콘크리트 바닥 위로 찰랑거렸다. 과자봉지며 쇼핑백 들이 바람에 휘감겨 가장자리로 쓸려갔다. 아파트에서 야채수프 끓이는 냄새와 공장의 금속 냄새가 바람에 뒤섞여 실려왔다. _본문 97쪽
그는 자신이 정말로 떠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언제나 무언가가 그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삶은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버렸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_본문 109쪽
사람들은 말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그는 시간은 결코 약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은 그저 풍화시키고 흩뜨려놓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전혀 ‘약’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녀가 죽은 지 벌써 사 년이 흘렀다. 가끔 오후에 혼자 집에 있다보면 햇빛은 늘 그렇듯 침실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오고 레이스 커튼은 미풍에 흔들려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럴 때면 사랑받았던 것 같은, 잠이 들고 깨는 순간 옆에 누운 이의 손을 꼬옥 쥐었던 것 같은 기억 혹은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그 행복감을 되도록 오래 잡아두고 음미하려 애써보았지만 언제나 찰나로 끝나고 말았다. _본문 138쪽
추천사
이 놀라운 데뷔작이 맨 부커 상 후보에 오른 까닭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외로움은 깊은 슬픔을 자아내고, 주요 배경인 쇼핑센터는 그 자체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또하나의 등장인물 구실을 해낸다. _타임스
도시인들의 한숨을 그려낸 이 독특하고 다층적인 소설에는 유머와 비애가 공존한다. 언뜻 명랑해 보이는 케이트의 일기는 소비주의 사회가 어떻게 고독에 질식해가는지 드러내고, 유령 이야기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에 대한 통찰을 전한다. _가디언
이 매혹적인 데뷔 소설은 사랑과 고독에 관한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을 보여준다. 사립탐정을 꿈꾸는 케이트 미니는 정말 용감하고 매력적인 소녀다. _오프라 매거진
한 소녀의 내면에 대한 경이로운 통찰, 번화가 음반 매장에서 벌어지는 익살스러운 이야기, 경비원의 모습을 한 호소력 있는 히어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 최신식 쇼핑센터라는 공간에 대한 뛰어난 이해, 오싹한 이야기까지. 나는 이 소설의 모든 페이지에 경의를 표한다. _제니 콜건(작가)
소비주의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관찰이 이 소설을 흔한 미스터리 이상으로 만든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반전 덕분에 더 돋보이는 작품이다. _메리언 키스(『처음 드시는 분들을 위한 초밥』의 작가)
이 소비 사회가 낳는 모든 부조리와 지독한 슬픔을 예리하게 들춰내면서 개인들의 애달픈 이야기를 절묘하게 녹여냈다. _조너선 코(작가)
유령 이야기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이 긴장감 넘치는 작품은 유년기의 아름다움과 시시함 둘 다를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 독특하고 유머가 살아 있는 작품에서 오플린은 무엇보다도 소매업계의 기괴함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_인디펜던트
이 작품은 한 지역이 이십여 년에 걸쳐 변해가는 모습과, 실종된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오플린은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뛰어난 능력으로 삶에 내재한 슬프고도 기이한 부조리를 포착해 우아한 해석을 달았다. _옵서버
독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가슴 아프면서도 웃음이 나고, 긴장감 있으며 위트까지 느낄 수 있다. 작가의 독창성과 에너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오플린의 이 가슴 찡한 첫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고독에 관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들에 관해서 탐색한다. _텔레그래프
오플린은 유머, 사랑, 상실, 슬픔을 노련하게 배합해 이 시대 산문 문학의 절정을 보여줬다. 충분히 부커 상 후보에 오를 만하다. _퍼블리싱 뉴스
옮긴이 정숙영
중앙대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여행작가 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지은 책으로 『앙코르와트 내비게이션』 『금토일 해외여행』 『도쿄만담』 『노플랜 사차원 유럽여행』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 『옵티미스트』 『고양이가 기가 막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