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단순하지만 많은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질문!
집에 불이 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구해내겠습니까?
모든 것은 이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뉴욕에 살던 젊은 디자이너 포스터 헌팅턴은 어느 날 저녁 파티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 질문을 생각해냈다. 자리에 모여 있던 친구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들을 내놓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이어졌다. 그는 이 질문을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더버닝하우스닷컴(theburninghouse.com)’이 시작되었다. 10개의 게시물로 2011년 5월 처음 문을 연 지 몇 시간 후 매사추세츠 주의 지은이가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또 한 시간 후에는 영국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올렸다. ‘버닝 하우스’는 웹상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각종 매체에서 다루기 시작했으며, 이런 영향에 힘입어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포스트들이 답지했다. 결국 밀려드는 모든 답들을 게재하는 대신, 지은이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별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로 했다. 그 기준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 각기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포괄할 수 있을 것. 둘째, 무엇이 사람에게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 열려 있을 것.
‘버닝 하우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지은이의 인생도 달라졌다. 그는 커다란 열정 없이 일하던 뉴욕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홈페이지의 범위를 넓히고 책을 만드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뿐 아니라,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답 또한 싣기 위해 직접 폴크스바겐 밴을 타고 길을 나섰다. 로키산맥 주위와 서부 해안가 수천 킬로미터를 밴을 타고 여행하면서 맨해튼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답을 사진으로 찍어 글과 함께 올렸다. (그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작은 밴에 인생의 모든 것을 싣고 다니는 사람들의 사진을 담은 책을 출간했고 여행의 기록을 담은 또 다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지은이 자신의 ‘리스트’도 실려 있다. 그는 맨 처음 이 질문에 답했을 때는 이 리스트가 18개의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답을 보면서,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이 리스트는 단 두 개로 줄었다. ‘버닝하우스 프로젝트’의 모든 사진과 자신의 추억들이 들어 있는 외장 하드 드라이브와 카메라 한 대가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리스트를 보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을 갖고도 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불이 났을 때 나는 열여덟 개의 아이템을 꼭 챙겨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6개월 동안 하면서 딱 두 개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확연하게 줄어든 이유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각기 다른 리스트들을 두고 나누었던 많은 대화들 때문이었다. 대재앙 속에서도 물건들을 꼭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전 세계 사람들의 이야기와 대답 덕분에 나는 가장 아끼는 벨트나 신발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_「책을 내며」에서
‘지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책에는 지은이처럼 아주 적은 수의 물건을 답한 사람도, 혹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 사람도 있지만, 불이 난 급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챙겨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들을 리스트에 적고 사진을 찍은 사람들도 있다. 결국, 이 질문은 은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불이 난 상황에서 갖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화재를 겪은 몇몇이 이 책에서도 지적하지만, 거의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은 ‘지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도, 사는 지역도, 직업도 천차만별인 이 사람들이 고르고 골라 올려둔 사진과 리스트 들은 “마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의 대역(大役)” 같기도 하고, 일종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또 흥미로운 것은, 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고른 물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공통된 마음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여기 소개된 가장 나이 어린 세대들은 아이폰, 노트북, 외장 하드 등을 많이 골랐다. 반면 나이 든 세대들은 필름, 일기, 편지 등을 많이 꼽았다. 굉장히 다른 물건들이지만 그 기능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지금 당신의 모습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물건들을 모아 찍은 사진이 있고, 사진을 올린 사람에 대한 아주 간략한 소개(이름, 나이, 직업, 지역 그리고 웹사이트 주소)가 있고 거기에 사진의 물건들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혹자에 따라서는 왜 이 물건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그저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들만 나열하여 상상력을 자극한다. 재미있게도, 이 의미심장한 리스트를 이들이 사는 지역과 직업, 나이 등과 연관해서 살펴보면 이야기가 그려지고 당사자의 개성이 뚜렷이 잡힌다.
60세의 한 가정주부는 개와 그를 위한 간식, 남편과 그를 위한 간식, 그리고 잔돈과 소액 지폐를 두둑이 챙기겠다고 답했다. 개가 남편보다 리스트의 상위를 차지했고, 둘 모두가 그녀에게는 돌봐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카드보다는 현금 사용을 선호하는 다소 보수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든다. 두바이에 사는 한 젊은 여성은 수많은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챙겼다. 그녀는 “두바이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외모와 매력을 가꾸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처럼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들은 불타는 집에서도 자신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물건들을 챙겨나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짧은 질문을 통해서 한 문화권에 대한 비평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반려동물,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반려동물의 사진이나 기념품이다. 그만큼 그 작은 존재들과 보냈던 시간이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나 태블릿 PC 같은 값비싼 전자기기를 챙겨 나오겠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는 비싸기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 자신의 역사와 추억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컴퓨터에 남자의 이름을 붙여 인격화하기도 했다. 리스트에 책을 포함시킨 사람들도 많다. ‘서점에 가면 같은 책을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하는 의아함이 일다가도 문득 납득하게 된다. 서점에 꽂힌 새 책은 ‘내’가 읽은 ‘바로 그 책’이 아니며 거기에는 그 책을 주었던 사람, 그 책을 샀을 때의 상황, 마음에 남는 문장에 그어둔 밑줄 같은 추억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바야흐로 물건들의 세상이다. 세상은 물건으로 넘쳐나고, 사람들은 물건들을 욕망한다.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정확히 짚어낸 ‘핀터레스트’ 같은 독특한 SNS 서비스도 성업 중이다. 이 책 또한 그런 ‘물건’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좀 다르다. 이 책에 수록돼 있는 수많은 물건들 중에서 세상에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들은 거의 없다. 비싸 보이는 것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온통 잡동사니들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물건의 주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 가장 급박한 상황에서도 꼭 챙겨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다. 흘러가버리는, 다시 안 올 시간을 붙잡는, ‘지금’에 대한, ‘나’에 대한 고찰이 이 책에 빼곡히 차 있다. 이 책은 결국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물건 몇 개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요약하거나 현재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금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곱씹어보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인 10인의 리스트 수록
책의 말미에는 원서에는 수록돼 있지 않던 한국인 10명의 리스트를 추가해 실었다. 이 책의 옮긴이인 이동섭 작가의 리스트는 물론, 뮤지션 이이언, 애니메이션 감독 정유미, 복합 문화공간인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 등의 리스트가 수록되었다. (정유미 감독은 자신의 리스트를 사진이 아닌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그려 보내주었다.) 옮긴이의 경우, 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면서, 처음 리스트를 채웠던 것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값비싼 것들이었지만 이것들은 곧 지워졌고 그 자리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차지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추억이었다. 살아간다는 일이 잊히지 않는 추억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나의 리스트는 곧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추억을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 내 리스트는 가격에서 시작되어 가치로 옮겨갔다. 가격과 가치는 다르다. 나는 그것들로 조화로운 리스트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의 내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_「옮긴이의 글」에서
‘더버닝하우스닷컴’은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답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