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주의자 이응준이 그려낸 존재의 끝,
그 깊은 어둠에서 길어낸 순결한 희망
1994년 단편소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를 시작으로, 정결하고 투명한 시적인 문체를 사용해 예술에 대한 깊은 열정과 고뇌가 깃든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이자 소설가 이응준의 네번째 소설집 『약혼』(2006)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약혼』에는 ‘사랑’을 화두로 한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약혼’이라는 제목이 주는 환하고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작품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 죽음과 죽음의 운명에 대한 질문이 이야기의 초점인 셈으로, 이는 몸과 영혼, 순간과 영원, 죽음과 불멸, 인간과 신 등의 관계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고통과 상처만을 가리키도록 설정된 삶의 나침반”(손정수)을 따라 “사랑의 폐허, 유적을 찾아 헤매는 시적인 질감의 언어”(한기)로 그가 직조해낸 드라마틱하고 치밀한 소설미학은 『약혼』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이응준 소설 속 인물들은 고통과 죽음을 본질로 하는 삶을 형상화한 ‘사막’이라는 은유적 공간 속에서 한순간에 명멸하는 신성의 현현, 죽음에 맞서는 의미를 좇아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불태우며 현실에 맞선다. 『약혼』의 인물들이 헤매는 사막의 한가운데에는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극심한 가뭄을 견딘다는 포도나무, 그것은 고통과 상처와 죄의 길에서 만나는 구원의 상징이자 죽음을 뚫고 살아나는 생명의 영원성에 대한 증거다.”(황도경)
지금까지 그의 소설에 짙게 드리운 고뇌에 찬 실존의 내면 풍경은 세계와 인간을 해석하는 새로운 감수성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인화지로 찍어낸 듯 선명한 이미지들에 얹혀 전해지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고독의 정조는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 보기 드문 초상을 새겨놓았다. 『약혼』에서 이응준 소설 속 ‘시적 아우라’와 감각적인 언어들은 단지 인상적인 아포리즘이나 두드러지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서사의 온몸이 시에 도달하는 순간”을 보여주며 “온전한 시가 되고 있다”(신형철). 더 간결해지고 정결해진 언어로 빚어낸 침묵과 여백은 시적 분위기를 넘어선 선(禪)적 경지의 아름다움마저 부여하며 유독 긴 여운을 남긴다.
『약혼』에 이르러 이응준 소설은 드디어 그 짙은 비극성이나 자멸의 정서로부터 벗어나 현존재들의 작지만 치열한 일탈 속에서 신-인간으로의 진전을 발견하는 희망의 징후가 엿보이기 시작한 셈이니, 『약혼』은 여러모로 이응준 소설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이응준의 소설세계는 삶에 대한 안이한 해법을 거부한다. 그의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걸출하게 출세했으나 한순간의 실수로 바닥까지 추락하고, 부와 성공을 눈앞에 두고도 별안간 끈을 놓아버린다. 병적으로 결벽했던 인물이 넝마와 쓰레깃더미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 사는 동네에 출현한 UFO를 목격했다고 믿고 있으며, 우주에 폐기된 인공위성의 작은 잔해가 충돌로 인해 일으킬 수도 있는 대재앙을 근심하고 두려워한다. 이응준의 인물들은 쉽게 사랑하나,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재의 깊은 덫, 그 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_서영은(소설가)
이응준 소설 속의 인간들은 시퍼렇게 젊다. 그리고 지혜롭다. 소년의 영혼을 가진 그들은 세속에서 쉽게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깊이, 오래도록 응시하고 자맥질한 끝에 치유책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존재는 진짜든 가짜든 태양에 기대지 않는, 산뜻하게 독립된 행성이 된다. 우리 모두가 티끌, 안개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했다는 칸트의 언명처럼 삶은 티끌의 소용돌이처럼 불안정하다. 기우뚱한 젊음은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_성석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