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다시 ‘사회적 연대’인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복지정책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인구의 노령화는 가속화되고,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에서 일자리는 점점 불안정해지며,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취약하다. 지난 수년간 복지정책은 각종 선거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으며, 누진과세나 연금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한 사회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도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프랑스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복지체제 구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다. 프랑스는 시민사회의 문을 연 1789년 대혁명 이후 복지국가 체제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까지 백 년 넘게 치열한 논쟁을 거쳤다. 그리고 어느 한 당파와 이론의 승리가 아니라, 여러 당파와 이론의 결합과 컨센서스를 통해, 즉 ‘연대’의 원리를 통해 사회보장의 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마저 압축성장을 꾀해왔고, 복지체제도 위로부터의 기획으로 단기에 부분 이식해버린 우리나라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래로부터의 충분한 논의와 합의 과정이 생략된 복지체제는 근본적으로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지 정책과 제도는 그것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이를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기꺼이 부담하려는 연대의식 없이는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고 유지되기 어렵다. 연대의식 없는 복지정책의 도입,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 없는 복지정책의 도입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복지정책에 앞서 연대의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담론과 지식의 확장이 반드시 팔요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를 주로 다루고 있으나 이 책은 단순히 프랑스 복지국가 형성사가 아니다. 프랑스 학계에서는 1970~80년대 이후 서구 복지체제가 맞이한 위기 앞에서 푸코 세대를 중심으로 그 복지체제를 이룬 핵심 개념인 ‘사회적인 것’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그런 연구 동향과 궤를 같이하며 복지국가 형성의 근본 동력을 재조명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시각이다. 복지체제를 이제 제대로 구축해야 하는 우리에게나, 재검토와 갱신을 위해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다시 숙고하는 프랑스에게나 이 과정은 매우 긴요할 수 있다. 복지체제의 한계와 가능성은 모두 그 뿌리에 자리한 ‘사회적인 것’과 ‘사회적 연대’의 개념 자체에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 복지 사상의 핵심 개념
복지국가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한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에서는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이론을 만들고,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던 일련의 노력을 ‘사회적인 것’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신분제로 대표되는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원리를 발명해야 했다. 혁명 주도자들은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구성원 간 의사소통과 토의를 통해 창출된 일반의지를 질서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혁명 주도자들이 실제로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주권자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극심한 빈곤층이었다.
이윽고 이 상황을 개선하고 해결하려는 지식이 등장한다. 1820년대에 이 새로운 지식은 인구의 다수가 겪고 있는 빈곤문제를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현상으로 인식했고, 이를 ‘사회문제’라 지칭했다. 그후 1880년대에 노동과 자본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을 때, 이를 중재하고 계급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통치의 테크닉으로 ‘사회연대’ 사상이 힘을 얻고 일련의 사회적 입법이 이뤄지면서 복지국가 프랑스가 성립하게 된다.
‘사회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가지는 불안, 특히 이들이 개인 단위로 대처하기 어려운 사고, 실업, 질병, 노령화 등 노동 능력 상실과 이로 인한 빈곤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며, 이를 ‘연대’라는 방식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적인 것’의 개념은 1980~90년대 서구 사회과학자들이 복지국가를 비판하거나 복지국가의 위기 혹은 전환기를 논하는 가운데 널리 알려졌다. 이때는 서구가 2차대전 이후 누렸던 경제적 풍요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삶을 제공할 수 있다던 복지국가의 황금기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일군의 서구 지식인은 복지국가의 기능부전과 비효율성을 보면서 이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전환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1970년대 말 프랑스 파리에서 미셸 푸코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푸코의 영향을 받은 자크 동즐로, 프랑수아 에발드, 조반나 프로카치 등이 그런 학자들이다. 이들은 복지국가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기층에 존재하는 지식들과 실천들을 ‘사회적인 것’으로 개념화했으며, 19세기 프랑스 역사 속에 ‘사회적인 것’이 자리를 잡는 과정을 검토했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관점은 복지국가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를 이끌었던 일련의 철학적 이념과 지식, 실천, 전략인 ‘사회적인 것’을 통치의 테크놀로지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복지국가가 생활수준은 향상시켰지만, 그 대가로 개인들은 주권자로서의 권리 행사를 포기하고 책임감 없이 수동적으로 살게 되었다고 본다.
반면에, 로베르 카스텔과 피에르 로장발롱 같은 학자들은 복지국가의 쇠퇴·위기라는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복지국가의 부정적 요소들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의 긍정적 가능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인 것’을 구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베르 카스텔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균형이 깨졌으며,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 및 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 복지제도는 자유로운 시장 운용과 기업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에 밀려 약화되었다고 본다. 피에르 로장발롱도 사회적 연대의 기초를 재발견·재정의할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장기화된 불안정과 ‘배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사회 속으로 ‘편입’시키는 ‘능동적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주장했다.
이런 논의를 이어받은 이 책의 저자 다나카 다쿠지는 19세기 ‘사회적인 것’의 문제설정과 해결책 제시에 있어 정치경제학, 사회경제학, 공화주의, 연대주의 사이에 차이가 있었으며, 이 사상들이 순차적으로 교체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사회입법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과정까지도 이들 사상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결국 혼종적 결합의 형태로 사회보장의 제도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경제학과 연대주의를 결합했던 프로카치, 공화주의와 연대주의를 결합했던 동즐로 등의 논의와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사회적인 것’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그것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검토하고, 이를 반성적 계기로 삼아 새로운 ‘사회문제’를 대면하며, 새로운 ‘사회적인 것’을 구상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문제의식과 결론에 있어 카스텔과 로장발롱의 연구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