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 실험문학의 기수 조르주 페렉 & 수학과 시의 작곡가 자크 루보
19세기 프랑스 문학사 거장들을 한낱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만든 사건과도 같은 책!
이번에 선보이는 조르주 페렉 선집 4권 『겨울 여행 / 어제 여행』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OuLiPo’의 구성원이었던 조르주 페렉과 수학자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자크 루보(Jacques Roubaud, 1932~ )의 작품이 함께 실린 특별판이다. 우리가 아는 19세기 불멸의 시인들―보들레르, 랭보, 베를렌, 말라르메, 위스망스, 로트레아몽 등―을 이들보다 앞서 존재한 한 무명 천재시인 ‘위고 베르니에’의 표절자들로 감쪽같이 몰아붙이는 페렉의 도발적 이야기 『겨울 여행』(1979년 첫 발표)과, 이에 매료당한 자크 루보가 치밀한 추리력과 울리포적 실험기법을 더해 펴낸 또하나의 기발한 역작 『어제 여행』(1992년 첫 발표)을 묶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와 창작시기가 다른 두 편의 소설이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새로운 개념의 창작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페렉의 이 ‘위고 베르니에’ 이야기 『겨울 여행』은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중인 울리포 구성원들 열다섯 남짓으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창작 소설의 장르 모험을 보여주는 『겨울 여행 & 그 연작들Le Voyage d’hiver & ses suites』(2013) 출간으로 메아리치게 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짧은 작품 하나로 그것을 손에 넣은 모든 사람을 십중팔구 흥분으로 불타오르게 만들었을 이 저주받은 시인…… 위고 베르니에. —조르주 페렉,『겨울 여행』
흔히 우리가 19세기 말 프랑스 시의 위대한 시인들에게서 ‘보들레르의 영향’이라고 식별해내는 것이 실제로는 베르니에의 영향이었던 것…… 말라르메와 크로가, 랭보와 코르비에르 혹은 라포르그가 『악의 꽃』에서 보들레르적인 것을 읽는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베르니에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크 루보,『어제 여행』
두 사람이 함께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은 아마도 우정의 가장 빛나는 형태 중 하나일 것이다. 페렉과 루보가 함께 쓴 『겨울 여행 / 어제 여행』은 프랑스 문학사의 이면을 여행하는 기발한 모험담이자, 표절·창작·다시쓰기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담론이며, 페렉의 작가적 여정과 개인적 기억을 다시 한번 호출해 새겨두려는 애틋한 추모의 글이라 할 수 있다. —김호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세부 소개】
20세기 후반 실험문학 모임 ‘울리포OuLiPo’에서 우정을 나눈 두 작가,
소설가 조르주 페렉과 수학자이자 시인 자크 루보의 글이 동시에 실린 특별판!
수학과 체스게임을 차용해 방대한 소설 『인생사용법』을 펴낸 조르주 페렉이 프랑스 현대 실험소설계의 기수라면, ‘수학과 시의 작곡가’라는 수식이 붙는 루보는 뛰어난 수학자이자 시인으로 현재까지 활발히 창작중인 살아 있는 실험정신의 표본이다. 각각 울리포에 1966년(루보), 1967년(페렉)에 가입한 두 사람은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루보가 결혼했을 때 페렉은 축시를 읊어주었고, 페렉이 죽고 난 후 그의 미완성 작품 『53일』 초고를 유작으로 복원시켜 펴낸 이도 루보다. 이 책은 두 실험정신이 만나 이룩한 서사의 힘과 창작법의 힘을 보여준다. 울리포 회원 열다섯 남짓으로 하여금 새로운 유형의 ‘공동창작 소설’을 쓰게 한 영감의 원천인 조르주 페렉 『겨울 여행』의 도발적 몽상에, 고도의 허구적 건축술로 날개를 달아준 뛰어난 수학자이자 시인인 자크 루보 『어제 여행』의 치밀한 추리력의 힘이 만난 결과다!
울리포 창단 멤버 프랑수아 르 리오네는 「잠재문학 제1선언문」에서 “그 저자들이 짐작했던 바를 종종 넘어서는 가능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즉 ‘발견’을 위해서 과거의 작품들을 살피는 분석적 연구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페렉이 19세기 한 무명 천재시인 ‘위고 베르니에’의 존재 가능성이라는 허구적 극단을 통해 기발한 새 문학사 기획의 잠재성을 발견해 유희했다면, 루보는 19세기의 베일 뒤로 여행한 페렉의 자전적 초상화와 무엇보다 19세기 파리의 천재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시구를 뒤섞어 ‘위고 베르니에’의 행적을 실화처럼 재구성해내면서 창작의 또다른 세계를 ‘발견’해낸다. 이 책은 두 작가가 서로 다른 시기에 써낸 두 편의 다른 소설이자, 하나의 이야기로 된 한 편의 쌍생아 같은 소설이다. 사실 이 두 여행Le Voyage d’hi(v)er은 한 끗 차이다. 루보를 필두로 울리포 구성원 열댓을 홀리게 만든 페렉의 기묘한 추리소설 『겨울 여행』은 루보의 『어제 여행』 속에서 실제와 허구, 표절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막힌 언어의 미메시스 세계를 펼쳐보인다. 리오네의 선언대로 이 울리포적 “영감은 러시아 인형처럼 하나를 다른 하나 안에 들이는 식의 일련의 제약과 절차들” 속에서 이뤄지는 만큼, 루보 안에서 페렉은 잘 입주된 영감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후대의 걸작을 미리 표절한 어느 천재시인의 이야기
―‘미리 앞서간 표절’ 문제로 문학사의 뒤안길을 여행하는 두 작가의 추리력과 새로운 문학 창작의 발상!
어제의 작가가 오늘의 작가를 표절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 “모든 텍스트는 인용문들의 모자이크이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병합이자 변형이다”라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말했다. 페렉 역시 자신의 글쓰기에서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을 인용하여 하나의 퍼즐놀이처럼 유희하기를 즐겼다. 두 거장이 결탁해 구성한 ‘위고 베르니에’가 존재하는 새 문학사 퍼즐판에서는, 19세기 천재들―보들레르, 랭보, 베를렌, 말라르메, 위스망스 등―은 모두 사기꾼이자 표절작가들이다! 그들보다 앞서 시를 썼던 무명의 한 천재시인 ‘위고 베르니에’가 있었고, 그를 감쪽같이 짜깁기한 후 말끔히 문학사에서 지워버린 파렴치한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위대한 시인들이다! 여태 속아온 이 문학사, 페렉과 루보가 이 역사의 뒷골목 안에서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진짜 있었을지도 모를 천재시인 ‘위고 베르니에’의 행적을 추리해가는 서사적 발상과 창작의 실험은 기막히고 놀랍다.
과연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가, 예술의 역사에서 선대 작가가 후대 작가를 표절하는 이 ‘미리 앞선 표절’이 정말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이미 짜인 역사(이야기)의 퍼즐판에서 이 빠진 퍼즐 조각을 찾듯 전혀 다른 문학사 기획을 상상해보는 일은 도발이자 전복이기 이전에, 창작가만의 면책특권을 한껏 발휘한 기발한 문학 유희라 할 수 있다. 『예상 표절』을 쓴 피에르 바야르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 용어와 사유의 원천을 울리포 작가들로부터 빌려왔음을 밝히고, 비선형적 시간관에 기반을 둔 창작과 표절 개념을 활용해 아주 기발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문학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표절은 문학에 간접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사실, 표절은 문학에 보내는 일종의 찬사다. 걸작의 속성이란 다른 작가들이 제 것처럼 직접 써봄으로써 그 작품이 열어놓은 길들을 탐험하도록, 혹은 꿈꾸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던가.” 바야르의 이 말에 따르자면, 바로 페렉과 루보의 이 두 작품은 창작과 표절과 모방의 세 줄타기를 통해 그 안팎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현기증나게 보여준 훌륭한 문학적 성취다.
페렉과 루보가 빚은 또하나의 새로운 ‘악의 꽃’―창작의 하늘 아래 모든 작가는 공범이다!
조르주 페렉은 문학사를 의심했다, 자크 루보는 그 의심을 하나의 사건으로 건축했다! 오늘 한 작가가 쓰고 있는 글은 전대에 썼거나 후대에 쓰일 것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게 다 있고, 생겨나고 있는 지금, 작가의 상상지대는 어쩌면 과거에 빚지고 미래에 빚질 창조적 소명에 대한 연대채무를 지닌 공모자들의 역사 무대인지도 모른다. 즉 페렉과 루보와 울리포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이 ‘위고 베르니에’라는 인물을 통한 ‘미리 앞서간 표절’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소급하고 있는 옛 작품들은 미래의 창작을 낳을 맹아임을 이 두 소설은 유쾌히 증명해내고 있다.
표지에 페렉과 루보의 얼굴이 조합된 묘한 이 이미지와 더불어, 두 작가의 불가사의한 공모로 꽃핀 이 ‘위고 베르니에’ 이야기는 말 그대로 또하나의 ‘악의 꽃’과 같다. 자크 루보가 보들레르가 위고 베르니에의 앞선 시집을 고스란히 베껴 스승 고티에와 문단을 속이는 고도의 허구 서사를 만들어낸 대목만 봐도, 우리는 창작의 세계에서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을 이야기한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그랬듯, ‘오늘의 미풍양속을 해친’ 또하나의 처벌시편을 보는 듯한 기시감과 동시에 이 교묘한 가짜 사실들로 화한 작품이 허구(창작)의 세계에서는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는 통렬한 환희를 맛본다. 그리하여 작은 소품과도 같은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문학의 역사, 창작의 역사, 또 그에 버금가는 표절의 역사에 대해 재미난 상상의 비전을 선물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