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 역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그를 이끈다. 글래스를 따라간 화려한 무도장에서 서른 살의 독일 여인 마리아가 도발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수시로 찾아와 폭력을 일삼고 돈을 요구하는 전남편과 달리 순수한 모습을 간직한 레너드에게 그녀는 강하게 끌리고, 성 경험은커녕 연애 경험도 없던 그는 성숙하고 적극적인 마리아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섹스의 신비와 즐거움을 알아간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지하 터널에서 종일을 버티는 그에게, 마리아와 사랑을 나누며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그녀의 아파트는 탈출구와도 같다. 그렇게 은밀하고 격정적인 사랑에 탐닉하는 사이, 불현듯 마리아가 패전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가학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난폭하게 달려든다. 그 사건을 계기로 마리아는 그를 밀어내지만 글래스의 중재로 화해한 두 사람은 마침내 약혼을 결심한다.
소설은 레너드가 몸담은 폐쇄적인 두 세계와 각각의 세계에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어수룩하던 그가 터널에서 맥나미의 등장으로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터널의 흙과 물, 금속은 물론 지상의 그 어떤 정적과도 다른 깊고 숨막히는 정적을 사랑하게” 되는 동안, 마리아의 아파트에서는 내재되어 있던 잔인한 욕망에 조금씩 눈을 뜬다. 하지만 두 세계는 결코 만나는 일 없이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레너드는 “일터에서는 누구에게도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을 발설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분리되어 있던, 분리되어 있어야 했던 두 세계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약혼식 날 예기치 못한 불청객의 침입으로 인해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뒤엉킨다.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진 채 레너드는 베를린 곳곳을 돌아다닌다.
이언 매큐언의 모든 것이 집약된 또다른 역작!
별다른 의문 없이 평탄한 인생을 걸어오던 한 청년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순수를 잃어가는 매 순간을 매큐언은 밀도 높은 문장으로 빈틈없이 그려나간다. 특히 약혼식을 마치고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진퇴양난에 처한 그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의 묘사는 매큐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치밀함에 더해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해당 장면을 묘사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자리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떤 장면을 보고 기억한 것보다 상상한 것을 훨씬 더 정확히 그려낼 수 있다”는 이유로 “기자가 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그는 소설가적 상상력과 외과의와도 같은 집요함을 십분 발휘해 마치 눈앞에서 진행되는 현재의 사건을 보는 듯 생생한 장면들을 창조해냈다. 이후 정신착란을 일으킬 만큼 피로와 초조감에 휩싸여 고군분투하는 레너드의 내면 묘사 역시 소설의 백미이다. 진정한 성인이 되기를 그토록 바라던 그가 정치적, 성적 순수로부터 멀어지고 도덕적, 법적 순수까지 잃게 된 지경에 이르러 자기합리화와 자포자기를 편집증적으로 오가는 장면은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참혹한 경험을 한 뒤 누구도 믿지 못하고 쫓기듯 거리를 헤매는 레너드가 도달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 결말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찾아들고,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비로소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영리함”(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탄복하게 된다. 또한 놀라운 반전은 장르적 쾌감을 선사할 뿐 아니라 깊은 여운과 문학적 감동마저 전한다. 첩보소설과 연애소설, 심리소설이 빈틈없이 결합된 『이노센트』는 이언 매큐언의 대가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또다른 역작이라 할 수 있다.
▶ 본문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싸늘한 방에 레인코트 차림으로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자니, 인생을 내던지는 기분이었다. 자포자기는 감미로웠다.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손바닥을 통해 그녀에게로 물밀듯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_103쪽
마침내 레너드는 스스로를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입문자, 즉 진실로 성숙한 성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순수함과 앎을 가르는 경계선은 모호했다. 황홀하도록 모호했다. _110~111쪽
창고에서 1미터씩 멀어질 때마다 마리아와 1미터씩 가까워졌다. 일터에서는 누구에게도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을 발설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비밀스러운 두 세계를 오가는 길 위의 이 시간이 진정 자기 자신이 되는 시간, 두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스스로를 별개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인지, 아니면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두 지점을 오가는 무無에 지나지 않는 시간인지. _137~138쪽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_299쪽
그는 수도 없이 상상 속 증인들, 검사들 앞에서 사실관계를 진술했다. 진실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라면, 설령 법과 관습의 제약으로 어쩔 수 없이 그를 처벌한다 해도 결국에는 그의 진실을 이해해줄 것이다. 자기 나름의 진실을 진술하는 것, 그가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_372쪽
▶ 언론평
매큐언의 작품 중 가장 탄탄하다. _가디언
전율과 긴장감으로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과 같은 플롯. _선데이 타임스
스파이 서사, 비극적 러브스토리, 통렬한 블랙코미디의 요소가 공존하는, 매큐언의 가장 다성적인 작품. _허핑턴 포스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비로소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영리함이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이다. _런던 리뷰 오브 북스
▶ 옮긴이 김선형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켄슈타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미 비포 유』 『수치』 『도롱뇽과의 전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을 번역했다. 2010년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