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외로움 하나를 담금질하고 싶다
―끊임없이 바다를 향하는 흰 그늘의 정신
남도에 대한 향수를 머금고 드넓은 바다의 풍광과 바닷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고 아름답게 묘사해온 김선태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그늘의 깊이』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더 깊어진 성찰은 마음의 바다에 가라앉은 오래된 것들을 언어로 건져올려 말갛게 씻어낸 후 우리에게 건넨다.
김선태에게 바다는 늘 뭇 생명들이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며 자애를 베풀기도 하지만, 풍랑이 거칠 때면 무수한 뱃사람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는 경외스럽고 신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던가.
아차 하면
순식간에 검푸른 파도가 삼켜버려
내로라하는 꾼들도 차마 근접을 꺼리는
삶과 죽음이 나란한 직벽에서
대물과의 한판승부가
끊어질 듯 팽팽한 반원을 그리는 곳
―「절명여」 부분
어쩌면 인간은 바닷가의 절벽 위에 홀로 선 존재다. “삶과 죽음이 나란한 직벽”에서 “까맣게 타버린 한 점 섬”(「흑산도」)처럼 서 있는 존재다. 그래서 바닷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들에게서 고통스런 세상을 결연히 살아가는 한 방법을 본다. 그래서 바다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물을 닮고자 노력한다. “波~瀾~萬~丈” 흐르며 “곡曲”과 절折”을 만들고(「강」), 뱃속의 장을 따라 흘러가는 술 한잔에서도 길을 본다(「진도 홍주」). 또한 1부의 제목이기도 한 ‘물북’은 아무리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음에도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정중동靜中動”의 북이다. 이런 물북의 절창이 시인이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저수지 속에는
손가락으로 가만 건드리기만 해도
바람의 입술이 살짝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입을 점점 크게 벌리는
그런 예민한 여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여자 커다란 물북을 끼고 앉아
한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게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느리고 둥근 선율을 피워올릴 것이다
―「물북」 부분
시집의 2부를 구성하고 있는 ‘섬의 리비도’ 연작은 시인이 그간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던 바다에 대한 관심을 해양민속생활사로까지 확대하였다. ‘산다이’부터 ‘조도군도 젖무덤’까지 총 12편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시들은 바다의 포용성이 여성적 이미지로 섬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자리잡은 사례들을 흥겹게 시 속에 녹여냈다.
다시래기는 모두 다섯 마당인데 그중 두번째 거사-사당놀이는 압권이지요 봉사인 거사의 마누라 사당이 몰래 중과 바람을 피우는 과정에서 터져나오는 발칙한 언사와 외설적 행위는 하도나 노골적이고 질퍽해서 초상집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지요 관 속의 망자까지도 못 참겠다 벌떡 일어나 뛰쳐나올 판이지요 특히나 사당이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은 죽음의 아픔을 딛고 새 생명의 탄생을 보여주는 상징이니 다시래기의 참뜻인 ‘다시 나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섬의 리비도2―진도 다시래기」 부분
진도의 풍속 ‘다시래기’를 편안히 이야기하듯이 풀어낸 이 시에서 볼 수 있듯 김선태는 섬사람들의 생활을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세밀한 묘사 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표정들, 낱낱이 읽히는 감정들이 참으로 정겹다. 남도 정서의 밑바탕에 깔린 한恨을 해학과 익살로 승화하여 신명으로 끌어올린 시인의 솜씨가 놀랄 만하다.
가난이라는 그늘이 싫어 필사적으로 아버지라는 철조망을 뚫고 달아났네
(……)
허나, 가난이나 슬픔이나 폭력이나 원망의 그늘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네
되려, 오래된 그늘에 새로운 그늘을 새끼 치며 무섭게 뻗어나가고 있었네
오랜 삭임 끝에야 드리운다는 말갛고도 흰 그늘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네
―「그늘」 중에서
시인은 자기고백적인 성찰이 담긴 이 시에서 “흰 그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한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온갖 신산고초를 겪고 진한 외로움을 오래 삭이고 나서야 찾아오는 흰 그늘의 시간. 그것은 아직 시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시를 쓰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