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홍 시인은 오래전 경남 창원의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십여 년 전 경남 합천의 황매산 기슭 산골 마을로 귀농해 직접 논밭을 갈고, 두엄을 내고,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다가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밤에 시를 쓴다. 나는 현재 동시문단에서 진정성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서정홍 시인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노동자로 일할 때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농부로 살고 있는 지금은 농사짓는 이야기와 농사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온 시인, 서정홍 시인에게는 삶이 곧 시요, 사람이 곧 시이다. 이번 시집에는 한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희로애락을 기록영화처럼 현장감 있게 펼쳐 보인다.”
서정홍 시인과 오랫동안 벗으로 지내온 김은영(동시인)은 그와 그의 동시집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땀과 흙의 농심, 상생의 시심으로 태어나다
산골마을 농부. 사람을 노래하는 시인. 뙤약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얼굴. 서정홍 시인을 떠올릴 때면 으레 생각나는 이미지다. 자연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딱 자신이 살 최소한의 공간에 터를 잡고, 제 손으로 키운 농작물이 어느 집 밥상 위에 올라가 여러 목숨을 살려 낼 거라는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그. 흙을 만질 때면 절로 착해진다는 농부의 철학은 시를 쓸 때에 사람과 뭇 생명,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놓는 상생의 시심이 된다. 시인은 삼십 년 남짓 한글을 아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만 읽어도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쉽고 가까운 시를 쓰겠다는 신념으로, 일하는 틈틈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써 왔다.
다섯 번째로 꾸린 이 동시 보따리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현장,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업, 자신이 만나는 이들을 쟁여 넣었다. 화려한 수식으로 그들을 값비싸게 치장해 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과 귀가 포착한 진짜 사연들로 구체성을 확보하고 그것이 가진 진정성을 조명했다. 그가 지켜온 시심은 한결같지만, 한 권 한 권 더해질수록 시의 진폭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를 쓰며 소중한 이웃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애썼습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로 썼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제게 ‘특별한 데가 없는 아주 특별한 시집’입니다.”_서정홍
어느 특별한 나라, 특별한 도시, 특별한 구의 주민들이 아닌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의 삶으로 엮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시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육체노동자나 농부와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더 안정된 직업, 화려한 위치를 선망한다. 조명 바깥쪽 배우보다 조명 아래 빛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명 배우들의 그늘에 가려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밥벌이조차 쉽지 않은 어느 보조출연자 아우에게서 서정홍 시인은 땀의 철학을 읽는다. 몇 초라도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면 그것이 설사 뒷모습이라도 주인공이 따로 있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 모두가 주인공이지, 하고 뿌듯해한다는 그의 말은 이 동시집의 굄돌이 되었다.
드라마 보조 출연자를 엑스트라라고 해.
어떤 사람들은 노가다라고도 해.
그냥 일용직 노동자야.
날마다 일거리가 있는 게 아니거든.
(…)
그래도 우리가 출연한 사극이
시청률 사십 퍼센트가 넘는다고 떠들어 대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 한마디씩 해.
“저 바닷가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게 나야.”
“자네 바로 옆에 죽은 척하고 있는 건 나지.
그때 얼마나 추웠던지 눈물 콧물 다 쏟았어.”
“야, 주인공은 아니래도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기분은 좋다야.”
(…)
_「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부분
천장에 비 새는 집은
옥상에 올라가 낡은 시멘트 지붕을
그라인더로 갈아야 할 때가 많아.
그런 일을 할 때는
어휴, 뿌연 먼지가 일어나 앞이 보이지 않아.
페인트 방수액을 섞을 때는
어찌나 냄새가 지독한지 머리가 띵해.
며칠 전엔 어떤 할머니한테서
안방 천장에서 비가 샌다며
갑자기 연락이 왔어.
그날이 우리 집안 제삿날인데도
밤늦도록 수리를 다 해 주었지.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_「다시 태어나면 무얼 할까」 부분
시인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잘났든 못났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카메라 앞에 불러 세웠다. 방수 페인트 기능사 요한 아저씨와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이모, 담배 앞에서 금연 계획을 수도 없이 수정했을 아버지와 호미만 보면 냉장고에 보관하는 새미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 시인이 만난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한 편의 영화로 기워졌다. 하루 백오십 군데나 택배를 배달하면서도 할머니가 건네는 생강차 한 잔에 피곤이 녹아들고(『따뜻한 사람들』) 농사지어 먹고살기 힘들지 않느냐는 선생님 말에 오늘 아침밥 먹고 왔다고 대꾸하고(『학교에서』) 택시비를 헤아리다 그만 장까지 걸어간 이야기를 자랑스레 풀어놓고(『진주 할머니』) 바쁜 농번기에도 오고가다 받은 절값을 해야 한다며 굳이 남의 집 배추 모종을 함께 심기도 하는(『절값』) 이웃의 모습은 익살이 넘치는 희극이 되고, 감동이 있는 다큐멘터리가 되고, 사회의 편견에 맞서는 풍자극이 되었다.
변두리로, 변두리로, 더 변두리로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모두가 주인공이지.
카메라 앞으로 호명된 그들은 더 소외받고 약한 것들에게 눈을 돌리고(목수 자중 삼촌이 총알 박힌 나무에게, 산골 목욕탕 주인아저씨가 외로운 노인들에게, 산밭 매는 농군이 삶터를 잃은 멧돼지에게, 어느 가족이 비 맞은 떠돌이 개에게) 그럼으로써 그 모든 것은 약한 것에서 그들의 가치를 오롯이 드러낸 강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동시집을 보고 있노라면 세간에 보잘것없다 여겨지는 삶이 착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곶감을
새들이 쪼아 먹는 바람에
할머니는 진지만 잡수시면
밖에 나가 새를 쫓습니다.
(…)
삼식이 아재가 찾아와
죽은 새 한 마리
처마 밑에 걸어 두면
새들이 안 온다기에
할머니와 나는
죽은 새 한 마리
처마 밑에 걸어 두었습니다.
원, 세상에 이런 일이!
동네방네 새들이 모두 날아와
죽은 새 곁을 빙빙 돌며
야단법석을 떱니다.
(…)
할머니와 나는 죽은 새를
얼른 땅에 묻어 주었습니다.
_「새들도 문상을」 부분
그 어떤 죽음도 가벼울 수 없다. 그 존재가 지나온 삶도 가벼울 수 없다. 하지만 때로 인간은 그것을 편한 대로 간과하고 함부로 다룬다. 그러하기에 텃밭을 일구려 병든 감나무를 자를 때 적어도 나무에게 미안타 속삭이며 밑동에 된장을 발라 주는 밤골 할머니의 손길(『감나무와 된장』)이, 오래도록 식구를 지켜 주는 산과 나무, 산새들과 산짐승들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큰절을 하는 가족(『이사 가는 날』)이 쉬이 지나쳐지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귀먹은 개를 한식구로 받아들이고, 산밭에 심은 고구마를 멧돼지와 나눠 먹고, 지나가는 영구차와 자동차에 치인 개구리를 보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공생의 삶으로 나아간다.
사람 냄새 땀 냄새 묻어나는 현실주의 시
우리 동시의 가벼움을 극복하는 오래 묵은 장맛 같은 시
서정홍 동시는 오래 묵은 장맛처럼 우리 동시의 가벼움을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 기교주의가 보여 주지 못하는 웅숭깊고 진솔한 삶의 세계를 현실주의 문학으로 그려 낸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이나 말장난을 소재로 하지 않는다. 비유도 거의 쓰지 않는다. 수사와 기교를 내세우는 순간 난해함이 그 자리에 밀고 들어와 아이들과 멀어지고, 일하며 사는 사람들과 멀어진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_김은영(동시인)
1부에는 택배 기사, 목수, 목욕탕 주인 등 주로 노동자들의 삶을, 2부에는 농부로 살아가는 시인 자신과 가족의 다채로운 일기를, 3부에는 이웃들의 애환과 소망을, 4부에는 사람과 뭇 생명의 공존에 대한 성찰을 시인의 소박하고 정직한 언어로 담았다.
우리 가까운 곳에서 펼쳐지는 삶과 그 삶을 꾸민 데 없는 언어로 드러내는 것, 그럼으로써 무채색으로 보였던 그것을 본연의 색으로 환원하는 것.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실한 세상을 펼쳐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서정홍 시의 맥이 아닐까.
시인에게 욕심은 없다. 다만 이 동시를 읽는 아이들이, 땀 흘려 일하고도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이 책의 ‘고모할머니’처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숱한 생명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건네는 것이다.
고모할머니는
지나가는 영구차를 보고도
머리 숙여 인사를 하신다.
야속한 세상
다 잊으시고 편안하게 가시오.
고모할머니는
자동차에 치인 개구리를 보고도
머리 숙여 인사를 하신다.
부디 다 용서해 주고
잘 가시게.
_「고모할머니」 전문
서정홍 시인은 얼마 전부터 산골 농부들과 뜻을 모아 ‘청소년과 함께하는 담쟁이 인문학교’를 열었다. 도시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배울 수 있지만, 산골 마을 사람들은 쉽지 않기에 벌인 계획. 특별한 욕심도 계획도 없다고 말하지만 시인은 지금껏 농촌살리기운동과 더불어 생태귀농학교, 우리말살리기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고 앞으로도 자신이 해 나갈 몫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엔 사람 냄새 땀 냄새 나는 시가 있을 것이고, 또 언젠가는 바람대로 이 땅의 아버지들을 생각하며 같은 아버지로서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과 콩 심을 때 콩 심고 팥 심을 때 팥 심으며, 지금처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고 싶어요. 땀 흘려 일하는 틈틈이 가슴에 시가 찾아오면 시를 쓰고 노래가 찾아오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요즘은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농사철이라 하루해가 어찌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대추와 녹두 따고, 콩과 수수 베고, 들깨 털고, 고구마 캐고, 마늘과 양파 심을 이랑 갈고, 찾아오는 손님들 맞이하고……. 몸은 바쁘지만 신바람이 난답니다.”_서정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