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국기’ 시리즈의 출발
『마성의 아이』 집필중 배경이 되는 또 다른 세계의 구상에 빠진 작가가 그 세계를 배경으로 집필한 십이국기 시리즈는 고대 중국 사상을 기반의 이세계(異世界)를 무대로 한 판타지 작품이다. 시리즈의 프롤로그이자 외전 격인 작품 『마성의 아이』가 1991년 출간되었고, 1992년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가 출간되며 대단원의 막이 열렸다. 치밀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 깊이 있는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900만 부(2014년 현재)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2002년 인기에 힘입어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십이국기의 붐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애니메이션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부터 네 번째 에피소드인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까지 총 네 권을 묶은 45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국, 중국, 미국, 대만 등에도 방영되었다. <십이국기> 애니메이션은 한국에도 견고한 고정 독자층을 형성하며 오늘날까지 인기를 이어왔다.
●‘십이국기’ 세계는
십이국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이다. 세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봉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열두 나라가 배치되어 있고 물로 이루어진 바다와 모래로 이루어진 바다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환상의 동물 기린(麒麟)과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공존하는 십이국기의 세계는 십이국기의 각 나라는 천계를 받은 기린이 선택한 왕에 의해 통치된다. 기린에게 선택받은 왕은 불로불사의 몸인 신선이 되며,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끝없이 치세를 이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면 기린은 병을 앓고, 기린이 죽으면 왕도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판타지 소설의 틀을 뛰어넘는 주제 의식
이처럼 광대하고 치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정통 판타지이지만, 판타지라는 장르는 작품을 설명하는 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굵고 강한 주제가 숨겨져 있다.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신뢰란 무엇인가’이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저마다 다른 주인공들은 판타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상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판타지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선천적 영웅은 십이국기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십이국기의 시작을 알리는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의 주인공은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가 듣기 싫어 모범생을 가장하고, 자신의 의지로 길을 선택하려 하기보다 남이 하는 대로 휩쓸려 가면서 오로지 남 탓만 하는 인물이다. 영웅은커녕 흠 잡을 곳이 훨씬 많다. 기존의 판타지 세계가 그야말로 환상적인 이상향을 제시하고 정해진 좋은 길로 주인공을 인도했다면,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처절할 정도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지켜주는 이 하나 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요마들에 맞서야 하고, 마음씨 착한 인물에게 도움을 받는가 싶으면 오히려 배신을 당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인물을 만나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 ‘행복’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된다. 주인공은 그동안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의 추하고 약한 모습을 직면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역경을 스스로 헤쳐나간다.
우리의 인생 또한 크게 다를 바 없다. 안고 있는 고민과 걱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것은 결국 주인공이 고민하는 주제 의식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십이국기 세계가 바로 현대 사회의 축소판인 까닭이다.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현실의 보편적인 주제를 적나라하게 끄집어내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것. 십이국기 시리즈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것은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십이국기 시리즈 첫 번째 에피소드
느닷없이 이세계(異世界)로 오게 된 요코는 십이국기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영문도 모른 채 십이국기 세계에 이끌려 온 것은 요코뿐만이 아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치밀하고 견고한 설정은 십이국기 시리즈의 큰 장점이지만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그 자체가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된다. 하지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알 수 없는 세계에 와 겪는 혼란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는 요코와 더불어 십이국기 세계의 설정들을 하나하나 체득해나가게 된다. 그 점에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첫 번째 에피소드로서의 기능을 100%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십이국기 시리즈에 입문하기에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를 시작으로, 앞으로 발표될 십이국기의 신작 장편까지 십여 권이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마성의 아이』와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을 12월 초에 동시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