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424개의 시작메모이고, 424개의 산문시이며, 424개의 에세이다!
권혁웅의 감성사전, 그 첫번째 이야기 <몸>
『미주알고주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문단 안팎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권혁웅의 산문집 『미주알고주알』을 펴낸다. 책에 붙은 시리즈 이름이 ´시인의 감성사전´인 데서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듯 이 기획은 사전의 방대함과 감성의 세세함과 그림의 상징함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다시 말해 책을 읽는 맛과 책을 쓰는 맛과 책을 보는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쓰이고 그려지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첫 주제를 ‘몸’으로 삼아 여기 496페이지의 두툼한 사전 형식의 책 한 권으로 빚어냈다.
책의 무시무시한 두께에 입이 떡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다. 술술 읽혀나가기 때문이다. 일단은 재미나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유연성과 탄력이 그 속도를 좌우한다면 권혁웅은 타고난 단거리 주자다. 한달음에 치고나가는 근육의 힘이 여간 아니라서 아무리 복잡하고 아무리 어려운 사유가 뻗어나간다 해도 읽는 우리들로 하여금 금세 만만하게 따라잡게 만든다. 무엇보다 정확한 문장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다. 아무렴, 유머와 위트는 기본이다. 다독과 다작이 절묘하게 균형감을 이뤘을 때 선보일 수 있는 글쓰기의 전형적인 스타일, 그 선례이다.
책에 실린 글은 1991년부터 2008년까지 그가 ‘몸’에 관해 사유해온 생각들을 바탕으로 쓰였다. 총 16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책은 몸의 부위에 따라 그 기능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나열을 해본다. ´잡다, 만지다´는 손, 손 주름, 손가락을, ´찾아가다´는 다리와 발을, ´웃다, 울다´는 얼굴을, ´보다´는 눈과 눈썹을, ´맡다´는 코를, ´말하다, 맞추다´는 입술, 혀, 입을, ´듣다´는 귀를, ´생각하다´는 머리를, ´겪다´는 몸을, ´떠맡다´는 등과 어깨를, ´안다´는 배, 가슴을, ´부풀어오르다´는 젖가슴을, ´앉다´는 엉덩이와 볼기를, ´달아오르다´는 성기를, ´닿다´는 피부를, ´두근거리다´는 심장을 각기 지표로 삼았는데, 저자 권혁웅은 그 안에서 파생되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우리 몸이 뿜어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특유의 감각적인 논조로 전개해나가고 있다. 예컨대 이런 방식의 글쓰기다.
겪다→몸
ː 가슴, 배, 등으로 이루어진 몸의 중심부분. 척추가 몸통을 지탱하고 갈비뼈가 가슴과 배의 주요 내장기관들을 보호한다. 내장기관은 소화기, 호흡기, 요생식기尿生殖器의 세 가지 계통으로 분류된다. 혹은 위와 대장, 방광, 요도, 정관, 자궁과 같은 관管이나 주머니 모양의 내장과 간, 신장, 정소, 난소, 갑상선, 부신과 같은 특유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실질성 장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머리와 팔, 다리, 생식기가 여기서 나 있다. (p241)
정육점과 사창가에서 붉은 전등을 켜놓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싱싱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말도 못할 슬픔이 거기에 있다. 끝내 가지 못하는 것, 그게 그리움의 속성이다. 홍등紅燈?먼 곳의 불빛을 살肉의 일로, 그것만으로 알린다는 것. 한 사람이 가진 식욕과 성욕 중 어느 게 더 큰지는 그곳에 출입한 횟수가 일러줄 테지만, 끝내 가지 못하는 곳이 또한 있는 법이다. (p259 「정육점과 사창가」 전문 )
웃다, 울다→얼굴
ː 두부頭部의 앞부분. 곧 눈, 코, 입이 있는 부분. 눈썹을 윗부분 경계로, 귓바퀴 앞부분을 옆부분 경계로, 턱을 아래 경계로 삼은 피부 영역이다. 이마는 표정의 일부를 이루지만, 얼굴이 아니라 머리에 속한다. 얼굴에는 한 쌍의 눈썹과 그 아래쪽에 안구가 있고, 눈꺼풀이 이를 덮는다. 아래위 눈꺼풀이 맞닿는 자리를 안검열眼瞼裂이라 부른다. 코는 특히 삼각뿔형으로 융기한 부분을 외비外鼻라고 하고, 외비의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비척鼻脊: 콧등이며, 그 아래쪽이 비첨鼻尖: 코끝이다. 입에는 아래위 입술과 그 사이에 구열口裂이 있다. 뺨과 윗입술과의 사이에는 비순구鼻脣溝가 있고, 아랫입술과 하악 사이에는 이순구燎脣溝가 있다. 얼굴의 표정은 안면근표정근이라 불리는 근육이 담당한다. (P71)
옮긴이의 말을 믿지 말아요. 소문은 무성한 거랍니다. (P73 「닫힌 책」 전문)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얼굴빛도 좋고 나이도 젊고 옷도 많았지”라고 여자는 조신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과 같이 나눌 거울은 없다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파경破鏡이란 거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사랑하던 이들이 서로를 마주보지 못한다는 것. 서로에게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P75 「파경」 전문)
이렇듯 우리 몸에 대한 사전적 정의로 포문을 연 챕터마다 많게는 40여 개에서 적게는 20여 개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활달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묘한 지점이라고 하면 글마다 그 스타일이라는 게 무대 뒤에서 디자이너의 스케치에 따라 훌렁훌렁 옷을 잘도 갈아입는 모델처럼 변신을 잘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노트였다가 일기였다가 시작메모였다가 산문시였다가 글의 섭동에서 오는 스타일의 자유로움을 자랑하며 우리 몸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를 구하는 이 책은 그러므로 전방위 글쓰기 교본이라 해도 무리이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 다양성을 다음의 예시를 통해 증명해보자면 이렇다.
여기 이런 시작메모들이 있다.
무심한 손가락이 잊혀진 사람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수가 있다. 천관녀 집을 찾아간 것이 말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면 김유신은 손가락을 잘랐을까. (p19 「김유신의 손가락」 전문)
길이 인생에 대한 은유라면, 교차로는 사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p47 「교차로」 전문)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안쪽에 있는 것, 그것이 안심安心이다. (p490 「안심」전문)
가출한 지 오래인데도, 그가 내 방안에 들앉아 있다고 여겼다. 마음을 그 방에 놓아두고 외출했던 거다. (p493 「방심」 전문)
더불어 이런 산문시들이 있다.
골목길 모퉁이가 긁혀 있다. 누군가 범퍼로 모퉁이를 밀고 갔다. 쪼글쪼글한 주름들이 모여 있다. 그곳이 처음으로 그대가 입술을 내민 곳이다. 누군가 그대를 열려고 했던 거다. 그대 입술을 모른 체 지나갈 수 없었던 거다. 그러나 담은 문이 아니어서, 그대는 소심했고 그래서 완강했다. 그대는 다만 허공虛空을 품은 자루처럼 앙다물었고 결국 쪼글쪼글해졌고 마침내 닫혔다. 그 사람도 그대를 지나치며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초보였을 것이다. 두근두근 그대 쪽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러곤 열리지 않는 벽 앞에 몇 마디 탄식을 놓아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그대를 지나쳐갔다. (p153 「누군가 그대를 지나쳐갔다」 전문)
여자들은 대개 왼쪽 젖가슴이 오른쪽 젖가슴보다 크다고 한다. 심장 때문이다. 안에서 두근거리니, 밖에서 부풀어오르는 거다. 동덕여대 뒤편, 산정에 큰 정자가 있는데, 새벽이면 주현미나 심수봉의 노래에 맞춰, 동네 아줌마들이 정자 주변을 무리지어 돈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칠까봐 꼭 시계 반대 방향으로만 돈다. 심장박동이 트로트 박자란 걸 거기서 알았다. (p339 「박자에 맞춰서……」 전문)
그리고 이런 에세이들이 있다.
‘우두커니’란 부사는 본래, 한옥 지붕 위에 일렬종대로 선 채 하늘을 보는 짐승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일심으로 높은 곳을 사모하는데, 왜 그들의 모습에 ‘넋이 나간 듯, 빈둥거리며’와 같은 어감을 추가했을까. (p247 「우두커니」 전문)
‘어처구니’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처구니없다’는 말은, 일이 너무 엄청나거나 뜻밖이어서 기가 막힌다는 뜻이다. 그대에게, 어처구니 있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p248 「어처구니」 전문)
‘미주알’은 똥꼬를 말하는데‘, 고주알’에는 뜻이 없다. ‘미주알고주알’이란‘ 아주 하찮은 일까지 속속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고주알’은 미주알 주변에 붙은, 사소하고 하찮은 부스러기를 말하는 게 아닐까? 미주알을 잘 쓰다듬어야 고주알이 따라온다는, 뭐 그런 용례. (p380 「미주알고주알 A」 전문)
책의 제목으로 삼기도 한 우리말의 조합 ‘미주알고주알’에 대한 새로운 ‘앎’은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쳐다보고 사람에 집중하게 하는 어떤 요령을 터득하게도 해주는 바, 이런 안팎으로의 시선두기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몸이 하는 말을 받아적고 싶었다. 몸이 하나의 우주라는 말은 상투어가 아니다. 우주는 적어도 다른 우주를 꿈꾸어야 한다. 그 꿈을 이르는 말로, 나는 ´사랑´보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P7 「자서」 중에서)라는 자기 고백은 너무도 당연한 지론일 터, 몸이 향하는 그곳에 당신이 있으니 사랑이고 말고가 아니겠는가.
글만큼 맛깔 나는 삽화는 서양화가 이연미가 맡아주었다. 글만큼 맛깔 나는 드로잉은 서양화가 이연미가 맡아주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세계를 엿보는 거시적인 무게감도 큰 의의가 있겠지만 한 챕터의 글로 한 세계를 엿본다 할 때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 바로 이 『미주알고주알』이다. 이연미의 그림은 글과 나란히 놓였을 때와 글 없이 홀로 놓였을 때 그 뉘앙스를 매우 다르게 풍긴다. 그 차이를 감안해서 책장을 넘겨봐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을 ‘몸에 대한 한 권의 백과전서’라 부를 수 있는 데는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읽으면서 찾고 또 보면서 찾으라는 시인과 화가의 친절한 배려가 합작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전은 브리태니커도 위키피디아도 아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고 또 없을 내가 만든 나만의 사전! 우리 모두 저마다의 관심사로 저마다의 사전을 편찬해보자는 야심한 포부 아래 이 책은 그저 소박한 샘플이라 여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