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사라졌던 아이가 돌아왔다. 『마성의 아이』는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미카쿠시’를 당해 행방불명되었던 아이가 1년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찰 것만 같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해피엔딩은 아닌 것처럼.
1991년 일본에서 발표됐을 당시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시리즈가 아니었을뿐더러 분류를 하자면 호러 소설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고립된 학생과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온한 일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형의 존재들의 수시로 등장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립된 학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거부감을 가지고 배척하는 것은 비단 어린 아이만이 아니다.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이웃 사람들도, 심지어 가족마저도 이질감에 유대감을 잃을 정도로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이라는 이유로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배척당하는 다카사토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가미카쿠시를 당한 동안 다른 아이와 뒤바뀌었다고(체인질링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냐”
『마성의 아이』는 우리 세상을 잘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다. 작가가 말하는 “고국을 잃은 것”과 같은, 자신이 속한 곳을 잃은 상실감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그런 감각을 불식시키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도시화, 핵가족화, 개인주의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운명 공동체’에서 ‘단순한 동거인’으로 변모해온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렇다.
『마성의 아이』에서는 ‘상실감’의 원인을 ‘임사 체험’과 ‘가미카쿠시’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평범하지 않은 체험을 이세계와 연결 지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사회적인 주제 의식을 다루고 있다. 그 주제 의식은 히로세와 다카사토라는 두 등장인물에 집약되어 있다. 어린 시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히로세는 저세상의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에 동화되지 못하고 꿈속에서 본 세계를 동경하는 그는 가미카쿠시를 당한 다카사토에게 공감하고 자신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카사토와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자신이 그토록 버리고 싶어 했던 소속감을 다카사토는 무엇보다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다카사토는 자신이 동경하던 이세계의, 그것도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다카사토야말로 선택된 존재라는 사실에 히로세는 절망한다. 선택받은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소속감을 필요로 했던 다카사토였기 때문이다.
히로세는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언제나 한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다카사토는 이야기한다.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당신은 인간이니까.” 상실감을 이상향에서 찾으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십이국기’ 시리즈의 프롤로그
1991년 ‘십이국기’ 시리즈 본편에 앞서 발표된 『마성의 아이』는 시리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립된 작품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다. 비로소 십이국기 0번째 에피소드라는 넘버링을 달고 시리즈로 묶인 것이 2012년 일본에서 완전판으로 재출간되면서부터다. 이번에 새로 출간되며 표지 일러스트가 바뀐 것은 물론, 『마성의 아이』에만 없었던 본문 일러스트가 추가된 것도 큰 특징이다.
‘가미카쿠시’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출판사로부터 청탁받은 오노 후유미는 ‘가미카쿠시’를 당한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설정해야만 했다. 현대 세계와 동떨어진 가상의 세계를 구상하면서 설정은 점점 견고해졌고, 취미로 지도나 연표, 도표까지 만들어가며 세계를 완성했다. 이것들은 십이국기 세계의 기본이 되었다. 『마성의 아이』가 없었다면 ‘십이국기’ 시리즈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프롤로그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