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의 시는 폴란드인에게 일종의 경전이다!”
폴란드 현대사의 자유와 저항의 상징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국내 최초 완역 시전집
"헤르베르트는 거인 안타이오스와 같은 힘을 지닌 시인이다.
그는 온 하늘과 인간 품위의 영역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간다."
_셰이머스 히니(아일랜드 시인)
"독창성, 상상력의 너비, 연민 어린 신중함의 측면에서
헤르베르트는 W. H. 오든, 엘리자베스 비숍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20세기 문학사에서 그가 써낸 작품의 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_워싱턴포스트 북월드
"시인의 이름을 가린 채 시를 읽어도 우리는 그 시가 헤르베르트의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여느 위대한 예술가처럼 그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_비슬라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시인)
"헤르베르트의 시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더라도
요즘 쓰여지는 다른 어떤 시인들의 작품보다 훨씬 정교하게 느껴진다."
_뉴욕 리뷰 오브 북스
"헤르베르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폴란드 작가다.
그는 T. S. 엘리엇, W. H. 오든에 비견될 만하다."
_뉴요커
문학동네에서 시인이자 번역가인 김정환과 손을 잡고 펴내는 <문학동네 세계시인전집> 시리즈 그 세번째 책을 선보입니다. 첫 권 셰이머스 히니, 둘째 권 필립 라킨을 이은 다음 주자는 폴란드의 국민 시인이라 불리는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은 이 시인은 폴란드 민족, 나아가 전 세계 약소민족의 양심이자 자존심으로 이번에 펴내는 시전집은 그의 시 세계를 말마따나 사전처럼 담아내고 있어 소수 시인들과 전공 학자들에 의해 알려져 왔던 그를 한국에 소개하는 데 큰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1924년에 태어나 1998년 돌아간 그는 시와 에세이, 희곡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활발한 작품을 해왔던 작가입니다. 폴란드인들에게 그의 텍스트가 ‘경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여러 이유 가운데 그 으뜸은 왕성한 필력이 우선시되기도 했겠지만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많은 폴란드의 예술인들이 검열과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을 떠나거나 절필을 선언했을 때 그는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해가면서까지 끝끝내 고국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전시 대학살의 순간이 오래였고 사회주의 체제 아래 식민의 세월이 이어진 폴란드의 역사가 우리와 퍽 닮아 있다고 할 때 그 시대를 현장에서 살아내고 써낸 그의 작품이 폴란드라는 한 국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단서가 됨은 과장된 표현만은 아닐 겁니다.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오르기도 했던 헤르베르트는 1950년 문예지 『오늘과 내일』에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소재로 한 시들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을 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동적인 경향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면서 사회주의 정부가 공인하는 ‘폴란드 문인협회’에서 공식적으로 탈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폴란드 국내에서는 더이상 작가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헤르베르트는 은행 사무원, 가게 점원, 위생설비 설계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작품 활동은 필명으로 신분을 감춘 채 문예지에 간헐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몇 년 뒤인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정치적인 이완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파급된 자유화의 분위기가 문화, 예술 분야로까지 확산되면서 헤르베르트는 폴란드 문인협회로의 복귀를 선언하게 됩니다. (최성은,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에 나타난 현실비판적 요소 연구」, 『세계비교문학비교연구 제25집』, 2008년 겨울호)
이번에 출간하게 된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은 1956년 출간된 그의 첫번째 시집『빛의 심금』을 필두로 1998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폭풍의 에필로그』까지 총 10권의 시집에다 빠졌던 작품들까지 한데 묶음으로 그의 시세계를 총망라한 책입니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역자 김정환의 저자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에 대한 오랜 관심이 집중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설명을 조금 곁들여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보다, 역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에 실린 시 『비』는, 역자가 1982년 번역하고 실천문학사에서 펴냈던 체스와프 미워시 편 『폴란드 민족시집』에 실렸던 시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고, 영어 중역이라 늘 께름칙했던, 그리하여 결국 이렇게 전집을 번역하게 만든 계기로 장장 삼십 년 넘게 작용했던 작품이다. 비가 내릴 때마다 생각나고 아쉬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비가 생각날 때마다 그랬다면 절반은 정말이다. 젊은 날 흥분과 감동의 기억을 삼십 년 넘게 뒤에 고스란히 살려줄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번역이 좀더 폴란드어 본문에 맞게 정확하고 충실해졌을 것이므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작품 해설 「비운의 순수 결정(結晶) 안팎 : 절망이 얼마나 영롱하면 희망의 육(肉)을 이루는가」 중에서, p876
『빛의 심금』은 폴란드 역사의 수난을 생 체험으로 기록한 시집이고, 『헤르메스, 개와 별』은 보편으로서 죽음과 일상을 파고드는 시집입니다. 부록격인 『시적인 산물들』은 전통의 서정과 신화의 서사 자체가 응축되면서 극히 모던한 감성의 구축을 구경하게 해주는 시집이고, 『사물 연구』는 사물 입장에서의 예술론, 특히 미술론이라 할 만큼 치밀한 묘사가 번뜩이는 시집이지요. 『명(銘)』은 ‘아버지를 기리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도 하지만 가톨릭 신비주의에 어느 정도 긴장이 흐트러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시집이고 『코기토 씨』에 이르러 헤르베르트 시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 ‘코기토 씨’가 등장하여 신화 해체에 대한 본격적인 시도를 유출해내고 있습니다. 판 코기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련의 연작들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도덕적, 철학적 상황에 대해 흥미롭게 고찰하기 시작한 것이죠. 특히나 노골적인 반정부활동을 전개, 특히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각인된 헤르베르트는 1983년 출간한 『포위 공격 받는 도시에서 온 소식』에서 비극과 희극이 서로 구별할 수 없음에 이른 현실을 바로 그려 보이고 있는데 이후 그의 최고 시집으로 일컬어지는 『떠나보낸 비가』를 비롯해 『로비고 지방』등을 펴내게 됩니다.
『폭풍의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남긴 채 헤르베르트는 세상을 떠납니다.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혁혁한 폴란드 레지스탕스 단원이었고, 후에는 소련의 폴란드 지배에 맞서 싸웠으며 스무 가지가 넘는 문학상 덕분에 근근한 경비로 외국 여행은 다녔으나 망명은 택하지 않은 시인. 헤르베르트가 죽은 직후 당시 폴란드 대통령이 ‘흰 독수리 훈장’을 추서하려 하였으나 미망인이 거부했고, 대통령이 바뀐 뒤인 2007년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동료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세상을 떠난 헤르베르트의 부고를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헤르베르트가 새로운 시를 발표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시집은 출간될 때마다 항상 시를 사랑하는 동호인들 사이에서 예술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곤 했다. 시인의 이름을 손으로 가린 채 읽어도 헤르베르트의 시는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의 시는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http://www.zbigniew-herbert.com/(최성은 번역)”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폴란드 시인 헤르베르트. 그의 시전집에 부치는 첫 소감이라고 한다면 정의를 숙명으로 아는 한 지식인의 고집스러움이라 해야 할까요. 좀처럼 타협을 모르고 좀처럼 안주하지 않고 좀처럼 가르치려 하지 않는 그의 사유와 시어들은 우리가 쉽게 버리고 쉽게 놓치는 어떤 정신, 어떤 근원을 자꾸만 반성하듯 떠올리게 합니다. 모두가 유행처럼 우르르 몰려가 타협하는 세상이 아닌 자기만의 불안과 어둠 그 깜깜함 속으로 침잠하면서도 굽은 등을 펴지 않는 시대와 문학의 무소의 뿔. 이제야 우리에게 완벽하게 소개되는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를 읽으며 우리 시와 우리 역사가 왜 동시에 오버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속에서
내 형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이마에 은 별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별표 밑은
벼랑이었다
이 파편 조각에
그가 맞은 것은 베르됭에서다
아니면 아마도 그륀발트에서
(형은 자세히 기억 못 했다)
말이 많았다
여러 언어로
그러나 가장 좋아한 것은
역사의 언어였다
숨쉬기 힘들 때까지
명했다 일어나 공격하라고, 전사한 동료들
롤랑과 코발스키와 한니발한테 말이지
고함쳤다
이것이 마지막 십자군 원정이라고
곧 카르타고가 함락될 거라고
그러더니 흐느끼는 와중 고백했다
나폴레옹이 자기를 싫어했다고
우리가 보기에
그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감각이 그를 떠났다
천천히 그는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갔다
음악의 귀 조가비 속으로
들어섰다 돌 숲 하나
그리고 얼굴 피부
죄였다
멀고 메마른
눈 단추 두 개로
그에게 남은 것은 단지
촉각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는 손으로 했다
오른쪽은 로망스
왼쪽은 병사 회고록
사람들이 내 형을 데려가
도시 밖으로 쫓아냈다
가을이면 그가 돌아온다
호리호리하고 무척이나 조용하다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그가 창을 두드리고 내가 나간다
우리는 함께 걷는다 거리를
그리고 그가 내게 들려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내 얼굴을 만지며
눈먼 손가락, 울음의 그것으로 말이지
-「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