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어머니, 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사 년이 되었다. 고인이 노년에 아치울 노란집으로 거처를 옮겨와 늘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허리를 숙인 채 땅에서 움을 틔워 올라오는 작디작은 생명들을 돌보던 마당 그 자리에, 이제 딸 호원숙이 대신 웅크리고 앉았다. 엄마 생전의 따뜻하고 환한 웃음을 고스란히 머금고.
고인이 십 년이 넘도록 집필실로 사용했던 글노동의 거처이자 손톱에 시커먼 흙먼지가 끼도록 손수 마당을 가꾸며 육체노동을 병행했던, 구리 아치울 노란집. 여전히 그곳에는 알록달록 색색의 꽃들과 식물이 가득하지만 어쩐지 조금 허룩해져버린 마당을 가꾸며 이따금 딸은 생각한다. 엄마는 어디 갔을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자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보물!
더없이 벅찬, 당신이라는 축제
엄마라는 커다란 존재 앞에서 딸은 그 나이와 관계 없이 아이가 된다. 엄마를 잃은 딸은 더욱 그렇다. 볼 수 없으므로 더욱 만나고 싶고, 만질 수 없으므로 더욱 어루만지고 싶다. 손이라도 한 번 더 잡고 싶고, 뺨이라도 한 번 더 부비고 싶다. 딸이 아니었던 사람도 이토록 그리울진대, 딸의 심정은 오죽하랴.
엄마의 육필원고를 직접 신문사나 출판사에 들고 나르던 어린 딸은 이제 엄마를 활자로만 만날 수 있게 되어버렸다. 한국문학사의 큰 획을 그은 故 박완서 작가에게 맏딸 호원숙은 더없이 살뜰한 식구이자, 다정한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이자, 냉철한 비평가였다. 남편과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가정의 여러 근심거리를 큰딸과 함께 나누었던 것은 물론, 국어교육을 전공한 딸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어머니의 문학을 함께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절판되거나 판권이 만료된 어머니의 책을 개정판으로 새롭게 엮어 펴내거나 새로운 글들을 발굴해 책으로 묶는 작업을 도맡아해왔으며, 이번에는 박완서 작가 타계 4주기를 기념하여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자신의 두번째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엄마 박완서를 쓰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다』를 출간한다.
이 책은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그전’은 박완서 타계 전 엄마와 딸의 평범하고도 소소한 일상으로 꾸려져 있다. 아주 오래전 아이를 낳을 때 직접 산구완을 해주시던 어머니를 회고하는 것에서부터 최근 들어 함께 영화관 나들이를 나서던 날까지, 엄마의 모습을 소상히 회고한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매사 자유를 주면서도 깊은 신뢰의 마음으로 의지하고 지켜보아주었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오랜 세월 이어온 긴밀하고도 쫀쫀한 가족의 정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귀중한 힘으로 작용한다.
2장 ‘그후’에서는 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이후의 일들이 펼쳐진다. 따로 문학관을 만들지 말고 아치울 노란집에 맏딸이 들어와 살기를 원하셨던 고인의 유지에 따라 호원숙은 엄마의 보금자리에서 엄마를 추억하고 되새기며 진정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엄마의 손, 엄마의 발, 엄마의 말, 엄마의 뜰, 엄마의 물건 등등 엄마의 모든 것을 썼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대문호 박완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또 많은 것을 함께 해낸 자로서의 소상한 고백이자 가장 큰 그리움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문학관이며 산증인인 셈이다.
3장 ‘고요한 자유’에서는 호원숙 스스로의 이야기를 모았다. 평소 꾸준히 문학을 가르치면서도 본인의 글쓰기를 계속해오며, 소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아침산책길이나 여행길에서도 살아생전 어머니의 언행은 늘 마음속에 함께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삶의 곳곳마다 여전히 살아 숨쉬며 살아가는 데 귀중한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실보다 치열하고, 소설보다 아름다운……
생생하게 펼쳐지는 옛 추억 그리고 되살아나는 아련한 그리움의 만남
책의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故 박완서와 맏딸 호원숙 그리고 다른 자매들과의 오래된 흑백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전 그날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박완서의 소설 속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과 뼈아픈 시대 상황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가족이 지내온 역경의 시간들 너머에 따스하고 애틋한 정과 사랑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평소에 박완서와 친분이 두터웠던 후배 문인 이병률 시인이 고인의 집에서 직접 촬영한 유품들의 사진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다. 고인이 살아생전 직접 사용하던 그릇이나 카메라, 재봉틀과 액세서리 등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갈하다. 물건들은 말이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했을 시간을 건너 다정하게 놓여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표지에 쓰인 붉은 맨드라미 손그림은 어머니의 마당에서 식물들을 가꾸며 호원숙 작가가 직접 그린 것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모의 정을 한층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최근, 개정판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박완서 산문집 『호미』출간 당시에도 작가가 틈틈이 그려두었던 그림이 본문에 어우러지면서 한층 더 화사하고 따스하게 해주었다. 호원숙의 그림은 정교하거나 미려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선명한 색감과 투박한 듯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연필의 질감에서 묘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이 책은 박완서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자체로 호원숙의 이야기가 된다. 모녀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박완서가 곧 호원숙이고, 호원숙이 곧 박완서이다. 엄마는 어디에 간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여전히 여기에 있다. 바로, 우리 곁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