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낯익은 불 밝힌 창과 같기도,
너무 먼 창, 아주 이상한 해득할 수 없는 어떤 것 같기도.
오롯이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의 존재 옆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누군가가 간신히 내미는 손…
“어린 시절 살던 집이 동숭동 낙산 밑에 있었어요. 산 바로 밑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었는데, 꽃이 피면 꽃천지가 되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곤 했죠. 꽃이 너무 많아서 두려울 정도의 색채감이었다고 말하면 표현이 될까요? (…) 가을, 겨울 계절마다 뚜렷한 특징이 있어서 말하기도 아까울 만큼 무언가가 있던 집이에요.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_김채원·문혜원, 「언어와 색깔의 초록빛 하모니」, 『문학의 영감이 흐르는 여울』
일상을 딛고 기억의 심연을 향해 온몸을 기울이는 탁월한 균형감각!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김채원, 그녀가 십일 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
‘깨끗이 헹군 빨래가 마르는 것을 보는 듯한 감동’을 주는 투명한 문체로 결코 없어질 리 없는 인간의 운명적 쓸쓸함, 어쩔 수 없는 삶의 허망함을 통해 자기 구원에 끊임없이 천착해온 작가 김채원의 아홉번째 소설집. ‘자기 스스로를 원질(原質)로 한 고백체형 소설의 순금 부분을 이루었다’(문학평론가 김윤식)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녀가 필생의 공력을 담아 『쪽배의 노래』를 펴낸다. 아렴풋한 기억 속에서 건져올린 ‘그 집’의 풍경은 첫 작품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김채원 작품세계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그녀의 손끝에서 풀려나온 시간의 빛은 과거의 샘으로부터 흘러와 맑디맑은 영원 속으로 떠내려간다……
그 집의 사계는 그 얼마나 계절마다 절정이었으며 도취였던가. 하늘의 별까지도, 기러기떼, 저녁 연기, 담 밖으로 쓸려나가 사라져버리던 낙엽까지 세상 전체가 속했던 집. 그런 집에 사노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죽도록 노래 부르거나 자기를 다 바쳐 영화를 보러 다니게 되지 않을까. 오빠는 왜 그토록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을까. 그 많은 노래들을 어떻게 다 안 것일까. 또한 무엇 때문에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는 그 시기를 청춘으로 여기는 걸까. 그 열정, 사계와 함께 소용돌이치던 그 열정은 자연 자체가 만들어낸 환각이었을까. _쪽배의 노래, 310~311쪽
자폐적 외로움과 그리움, 그 모순된 별자리의 운명
우리가 마주치는 곳곳의, 때때의 ‘그 여자’……
풍성한 색감으로 지금 눈앞에 그 정경을 그려 보이는 듯한 회화적인 언어감각과 함께 김채원 소설세계를 특징짓는 여성인물의 자의식은 이번 소설에서도 강렬하고 서늘하다. 늘 한 발 비껴 서 있는 것같이 불안한, 자기 삶의 토대를 확신할 수 없고 확신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 그녀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내걸고 싶은 ‘사랑’에 뛰어들어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사로잡히려 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누군가 자신을 삶에서 떼어내는 것 같다고, 아니 스스로 삶에서 떨어져나오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인물들, ‘자신은 어쩐지 불행할 것만 같은 의식’에 사로잡힌 ‘그 여자’들을 통해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다른 두 존재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자유’를 얻는 것이 가능한지 묻고 있다. ‘그 여자’들은 행복을 위장하는 대신 불안에 몸을 맡기고 자신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달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 무너지듯 다가가면 안 된다. 기뻤던 만큼 슬픔, 쓸쓸함이 올 것이다. _물의 희롱, 142쪽
자신의 껍질과도 같은 곳, 자신의 동굴, 아니 자신의 심장, 그리하여 누군가가 이 영역 속에 한 발 내딛기라도 하면 심장에 발자국이 찍혀 가슴이 아픈—오직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낙원.
_조금 더 가까이, 105~106쪽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한댄다. 통로는 빛으로 만들어야 한대.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둠은 물러간댄다.
작가 김채원은 얼음으로 만든 맑고 서늘한 캔버스에 ‘비틀린 세계의 밑그림’을 꼼꼼하게 그려나간다. 그리운 사람이 죽어야 하고 서로 헤어져야 하는 고통 속에서 이들은 사랑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엔 눈앞에 벌어진 비극성 너머를 보게 하는, 존재와 생에 대한 순수한 질문이 담겨 있다. 그녀는 인간의 진정한 내부로 뚫고 들어가려는 붓끝으로 숨죽어 있던 일상의 ‘그 여자’들을 꼭 안아 다시 내어준다. 열린 거울 속 같기도, 잔잔히 고인 샘물 같기도 한 그녀의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문득, 제 얼굴의 반영을 확인하게 되리라. 그 흔들리는 그림자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건져올리지만 얼굴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고 만다. 그것은 곧 김채원이 지금껏 겨냥하고 그려왔던, ‘무와의 입맞춤’일 것이다.
허무한 열정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텅 비어버린 그 여자, 망연자실한 그 여자에게 또다른 그 여자가 말을 건다. 사랑이란 ‘상처받을수록 타오르는’ 것이라서 파멸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심신이 파국으로 달려갈 때 그것을 구원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결국 사람은 파멸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죽을 만큼 아픈 이별을 겪고 나서도 다시 살아가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무(無)를 향해 가는 것이다. 어느 것도 미리 주어진 것은 없다. 결국은 자신이 헤아려가며 그저 살아가는 것일 뿐. _문혜원(문학평론가, 아주대 국문과 교수)
이번 작품집은 ‘영원한 나의 초상’이자 ‘전폭적인 이해의 관계’였던 언니, 2013년 1월 30일에 타계한 소설가 故 김지원의 2주기를 맞아 펴내는 것이기도 해 그녀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애틋함을 더한다.
때로 바닷가 멀리까지 걸어가본다. 내일은 좀더 멀리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돌아설 때면 무엇인가 은밀하게 스며듦을 느낀다. 좀더 멀리멀리 내 힘이 쇠진할 때까지 걸어가보면 그 바다에서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언니 김지원의 2주기와 때를 같이하여 나오게 된 이 책은 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딘가에 바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하고 새삼 깨닫는다. _‘작가의 말’ 중에서
■ 덧붙임 김채원이 만든 단편영화 <거울 속의 샘물>, 아래 주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