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0년을 맞아 현대사회의 범죄와 어둠을 심도 있게 그린 장편소설 『결괴』를 발표하며 하나의 전환점을 찍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이번에는 SF 장르에 도전한다. 『던─중력의 낙원』은 이 년 반의 화성탐사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한 우주비행사가 겪는 혼란과 그 배경에 얽힌 가상의 사건들을 다루며, 과학적 근거와 과감한 상상력을 동원해 기발하고도 현실적인 미래상을 제시한 작품이다. 데뷔 이후 현대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천착해온 작가는 ‘개인’의 개념이 점점 사라져가는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 상실과 희망의 이야기를 완성해냈다. 이후 작품세계에 꾸준히 등장하는 ‘분인(分人, dividual)’ 사상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인류 최초의 유인 화성탐사가 몰고 온 거대한 스캔들
인간의 내면이라는 우주를 통해 바라본 근미래의 현실
2033년 여섯 명의 우주인을 태운 NASA의 우주선 ‘던’이 인류 최초로 유인 화성탐사에 성공한다. 대지진으로 어린 아들을 잃은 아픈 경험을 딛고 ‘던’의 우주비행사로 지원한 일본인 외과의사 사노 아스토는 이 년 반의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함과 동시에 영웅 대접을 받지만, 곧 그가 화성에서 겪은 모종의 사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의 딸이자 ‘던’의 승무원이기도 했던 생물학자 릴리언 레인이 선내에서 임신 후 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둘의 사이를 의심받게 된 것. 정체불명의 수술영상 유출로 시작된 소문은 코앞에 닥친 대통령선거를 좌지우지하게 될 대형 스캔들로 번지고, 한편에서는 전쟁중인 동아프리카에서 발병한 신종 말라리아가 미군과 관계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던’ 프로젝트의 이면에 깔린 복잡한 이해관계와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는 홀로그램이 등장하고, 콘택트렌즈형 모니터를 통해 그 자리에서 상대의 신원을 파악하며, 거리 곳곳의 CCTV에 찍힌 얼굴로 시시각각 모든 행적이 감시되는 사회. 『던』에서 그려지는 2030년대는 꼭 막연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과학기술과 실제 사례 등을 통해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별로 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유인 화성탐사라는 전 인류적인 이벤트를 응원하고 그 성공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유명인의 사생활이 담긴 동영상을 공유하며 익명의 여론을 통해 선거의 향방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CCTV의 공개화로 이름이나 ID뿐 아니라 얼굴로도 신원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피부에 넣은 보형물을 조정해 생김새를 조금씩 변형할 수 있는 가소성형 기술이 등장한다. 즉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면서 동시에 그 눈길을 피하려 노력하는 시대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 속에서 갈수록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작가는 ‘분인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내놓는다. 여러 개로 나눌 수 없는 고유의 개인이 실은 무수한 분인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대와 상황에 따라 분인의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이 개념은 작품 속 미래 세계에서는 이미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선거전에서 신구파의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또한 폐쇄공간과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서 고뇌와 갈등을 겪는 우주비행사들의 정신적 문제를 설명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의 몸은 하나뿐이니 그걸 나눌 방법은 없지만, 실제로 우리 자아는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어. 당신과 마주하는 나, 부모님과 마주하는 나, NASA에서 노노와 마주하는 나, 실장과 마주하는 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뀔 수밖에 없지. 이런 현상을 개인의 분인화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 각각의 내가 분인이지. 곧 개인은 분인의 집합인 셈이고. —이런 사고방식을 분인주의라고 해.
_본문에서
우주탐사 계획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 그릇된 애국심을 부추기는 전쟁과 테러, 유명인에 대한 매스컴의 속성 등 다양한 소설 속 주제를 하나로 묶는 이 분인주의는 곧 주인공 아스토의 개인적인 고뇌로도 연결된다. 대지진으로 외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주위 사람을 잃은 아픔을 우주를 향한 새로운 도전으로 극복하려 했던 그는 화성에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아내 교코와의 사이에 생긴 이 년 반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화성에 다녀온 인류의 영웅으로서, NASA 소속의 우주비행사로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세상을 들썩이게 한 스캔들을 일으킨 릴리언의 동료로서 아스토가 갖고 있는 각각의 분인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갈등인 셈이다.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로 이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커다란 스케일로 펼쳐 보이는 『던』의 줄거리는 이렇듯 한 개인이 앞으로의 삶에 필요한 희망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에서 분인으로, 밤의 어둠에서 새벽의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
현대인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철학적 SF
저는 『결괴』에서 이 시대의 곤란을 시스템과 인간 양쪽에서 생각해보았는데, 결과적으로 떠오른 건 역시 냉소주의 문제였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사람을 죽여선 안 되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을 믿을 수 있는가.
문제를 어중간하게 덮어두고 무조건 ‘치유’하려고만 들면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괴롭더라도 문제를 직시하고(『결괴』),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탐구하는(『던』) 과정까지를 한 세트로 생각하고 두 소설을 썼습니다. 『결괴』가 암흑으로 떨어져내리는 작품이라면 『던』은 빛이 비쳐드는 출구를 향해가는 작품입니다.
_작가 홈페이지에서(k-hirano.com)
히라노 게이치로 스스로 ‘제3기’ ‘분인주의 시리즈’라고 이름 붙인 전작 『결괴』와 『던』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결괴』의 주인공 사와노 다카시와 『던』의 사노 아스토는 안팎으로 복잡한 문제를 떠안고 고뇌하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맞는다. 지나간 문제는 덮어두라는 주위의 충고와 달리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는 아스토의 결정은 사회적 자아, 즉 분인의 회복으로도 볼 수 있다. 거대한 대혼란 ‘마엘스트롬’이 휩쓸고 간 후의 소강상태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결괴』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희망의 암시로 읽힌다. 예측 가능한 미래의 한 면을 제시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던』은 철저한 조사와 사실검증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상상력의 결실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현대라는 모호한 시대를 생각해보기 위해 데뷔작 『일식』 이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어떠한 경위를 거쳐 이렇게 되었는지 주의깊게 살피는 작업을 계속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이런 까닭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되돌아보기와도 같은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만 바라보고 있으면 현재가 그 인과관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모든 것을 결과론으로 돌려버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새로운 걸음을 내디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알아내려면 미래의 측면에서 현재의 자신을 상대화하는 시점도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소설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미래에 어떤 세상이 오리라는 계시는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상상해보면 지금 정체되어 있는 것들 하나하나가 다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정도는 독자와 함께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_「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