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쳐다봐주고 오래 만져주는 만큼 벽들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게 틀림없겠지요. 그래서 광주의 시인 임동확은 ‘벽을 문으로’라는 제목의 시를 일찌감치 피를 토하듯 써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문선희 작가는 80명의 증언에 30컷의 벽 사진을 한 묶음의 책 안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벽 사진의 제목을 그들 증언에서 빌려오기도 하였고요.
이제는 사십대가 된 당시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비슷비슷한 듯해도 사사로이 다른데, 어린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이들의 불완전성은 “사건을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명하게 그 부조리함을 대변하기 때문”에 보다 귀한 사료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예컨대 다음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말이지요.
“그때 YMCA 근처에 수협이 있었고, 그 앞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거기로 가서 보여주셨어요. ‘이게 총알자국이야’라고.-김보수(1980년, 11세)
“그리고 아침에 형이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빡’ 소리가 났어요. 보니까 밖에서 날아든 총알이 벽에 박혀 있었어요. 형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고개를 들고 있었으면 형 머리에 맞을 뻔했어요.”-김용선(1980년, 12세)
“그 길 사거리를 건너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따다다다, 하고 총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내 옆에 가던 형이 쓰러졌어요. 나는 어떤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시 후퇴를 했고요. 총을 맞은 형은 그 자리에서 툭, 쓰러져 죽었어요. 죽은 형은 총을 머리에 맞았는데, 얼굴 절반은 형태가 없었어요. 그 바로 옆에 제가 있었고요.”-최창호(1980년, 9세)
“날이 더운데 할머니가 어디선가 솜이불을 해오셨어요. 총알이 솜이불을 못 뚫는다고요. 옛날 집들은 담이 낮아서 총알이 집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김이강(1980년, 12세)
“공수부대는 개구리복을 입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무조건 잡아갔어요. 대학생들이 주택가로 숨으면 무조건 찾아내서 질질 끌고 갔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공수부대원들은 돌도 안 피하고, 화염병도 안 피하더라고요.”-서상석(1980년, 12세)
“그때는 어렸으니까, 탱크나 장갑차가 지나가도 아스팔트 바닥이 깨지지 않는 걸 보고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문영학(1980년, 12세)
“우리한테 빨갱이라고 하니까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됐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났다고 했는데, 우리한테 빨갱이라니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됐어요.”-강혜련(1980년, 13세)
“우리 동네에 최미현이라고 나를 엄청 귀여워해주시던 분이 계셨어요. 남편은 인성고 교사였고, 그때 미현이 누나가 스물일곱인가 여덟인가 됐었는데 임신중이었어요. 남편을 기다린다고 밖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서 죽어버렸어요. 그때 손수레에 누나를 실어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식구들이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나중에 5․18 묘역에 가니까 미현이 누나 묘가 있더라고요.”-김동훈(1980년, 11세)
『묻고, 묻지 못하는 이야기』, 이 책의 탄생에는 “역사 저편으로 잊혀가는 기억의 조각을 발굴하기 위해 좁은 골목들을 찾아다닌” 문선희 작가의 노고와 사랑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말함의 불가능성’을 품은 채 최대한 정확히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려한 ‘80명 아해들’의 용기도 큰 몫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 ‘동일한 사건의 목격자’임은 분명한 까닭에 그들의 목소리 가운데 교집합으로 묶이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사실 너머 진실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바로 새겨줘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80년 5월 광주의 새로운 오감도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