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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으면 4행, 길면 6행
아폴리네르가 이 작은 시 안에 담아낸 ‘인간사’의 모든 것!
『동물시집』-오르페우스 행렬
아폴리네르의 『동물시집』이 전공자 황현산 교수에 의해 번역, 출간되었다. ‘오르페우스 행렬’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시집은 1911년 3월에 발간된 것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바이다. 아폴리네르의 시 30편과 라울 뒤피의 판화 30점이 한 궤를 이뤄 아름다운 합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짧으면 4행, 길면 6행의 짧은 시와 한 편의 흑백 판화만으로 우리의 ‘인간사’ 전부가 표현된다는 점이 읽고 보는 내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문학과 미술이 가장 이상적으로 집약된 현현이라고나 할까. 이는 한 권의 책에 있어 삶의 어떤 이치가 경탄의 지경으로 절묘하게 딱 들어맞는 궁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테다.
100페이지 남짓의 얇고 가벼운 책이지만, 아폴리네르의 『동물시집』이 가진 무게감은 사뭇 되다. 30편의 시라고 하니 술술 넘기게도 되지만 여지없이 다시금 맨 처음으로 돌아가 그 첫 시부터 마주하게 될 때면, 읽어나가는 속도에 스스로 제어를 걸고 최대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만한 줄 알았는데 만만치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가 하는 일은 더 깊숙이 머리를 숙여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일일 터, 어려운 주제를 쉬운 이해로 풀어쓴다는 일의 귀함을 그때 비로소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노릇이다. 그것이 책의 본보기가 되는 책, 바로 고전이 가진 미덕 중 하나이리라.
*사자
오 사자여, 애통하게 추락한
왕들의 불행한 이미지여,
너는 함부르크의 철창에서만,
독일 땅에서만 태어나는구나.
-p21
*공작
땅에 끌리는 꽁지깃으로,
이 새, 부챗살 바퀴를 만드니,
아름답긴 한결 아름답다만,
어쩌나 엉덩이가 다 드러나네.
-p61
*부엉이
내 헐벗은 마음은 한 마리 부엉이
못박히고, 뽑히고, 다시 박히고.
피도, 열의도 끝장났구나.
누구든 사랑만 해주면, 나는 감지덕지.
-p63
“이 시집의 재미는 필경 동물들이 인간의 속성을 각기 나눠 가지고 있다고 믿는 척하는, 가장된 순진성에 있을 것이다. 시구는 동물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곧바로 인간 속성과 예술가적 삶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이 알레고리 또한 늘 어떤 교훈을 챙기지만 이 교훈에 억압적인 성격은 전혀 없어서 시의 오락성이 오히려 높아진다.”
“아폴리네르는 이 작은 시 안에 많은 것을 담는다. 그의 넓고도 촘촘한 지식,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개념, 정형화한 교훈들, 동물들의 특징과 그것이 지닌 비유적 가치의 표현, 이미지와 말의 오락적인 선회 등이 네 줄이나 다섯 줄의 시 속에서 모두 해결된다. 라울 뒤피의 목판화는 이 짧지만 조밀한 시의 구조와 잘 어울린다. 그는 늘 문제의 동물을 그리고 거기에 풍경이나 시와 관련된 내용으로 액자를 두른다. 따라서 판화에는 당연히 박학한 지식이 함축된다.”
-p78~79 번역자의 보충 주석 중에서
*벼룩
벼룩도, 친구도, 애인마저도,
우릴 사랑하는 것들은 어찌 그리 잔인한가!
우리네 모든 피는 그들을 위해 흐르지.
사랑받는다는 인간은 불행하지.
-p38
벼룩 : 아폴리네르는 자신을 늘 ‘사랑받지 못한 사내malaimé’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사랑 많이 받는 사내bien-aimé’와‘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차이는 별로 없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한꺼번에 고통을 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오랜 시간을 두고 그 고통을 나눠 받는다.
-p84 번역자의 보충 주석 중에서
이 시집의 번역을 맡음과 동시에 매 편마다 한결 쉽고 보다 깊은 이해를 돕고 있는 황현산 교수의 보충 주석은 이 책을 아낌없이 아낄 수 있는 주요한 키포인트로 손색이 없다. 시를 읽어나가는 데 있어 비유나 상징의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해설은 그 난감함의 캄캄함마다 딸깍 손전등을 켜주는 일로 묵묵히 제 빛을 발산한다. 그래서 쉽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해석의 여지에 있어서의 풍요로움은 그의 덕을 입은 여지가 너무도 크다 하겠다.
거북이, 말, 산양, 뱀, 고양이, 사자, 산토끼, 낙타, 생쥐, 코끼리, 애벌레, 파리, 벼룩, 메뚜기, 돌고래, 낙지, 해파리, 가재, 잉어, 세이렌들, 비둘기, 공작, 부엉이, 이비스, 황소, 그리고 오르페우스…… 여러분들은 평소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었을까. 이들에 대한 재해석의 재미가 집중력 있는 관찰과 사유에서 나온다 할 때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아마도 제3의 눈이 아닐까 한다. 세상사의 숨은 비밀 같은 걸 보게 하는 눈. 인생사의 부질없음을, 다시 말해 죽음의 공포를 그럼에도 견디게 해주는 건강한 정신의 눈.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고, 농담이 지혜로운 예언이 되고, 시는 또하나의 깊이를 얻는다 할 때 삶의 비밀을 모르며 사는 자와 알며 사는 자. 여러분들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는가. 어쨌든 매일같이 우리 삶의 비밀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예서 아폴리네르로부터 배워야 할 삶의 태도 하나는 이렇게 건진 듯하다. “나는 경탄한다”라고 말한 그의 좌우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