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풍경, 그 실재하는 장소를 찾아 떠나는
파리 시간여행
‘밤이 내려앉은 파리의 어느 후미진 골목, 어디선가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다가온 마차 한 대. 그리고 펼쳐지는 시간여행.’ 여기까지 듣고 머릿속에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개봉 당시 영화 속 주인공이 운명처럼 마주친 마차를 타고 피츠제럴드, 피카소, 달리 등 꿈에 그리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당시 파리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감동에 젖어든 관객도 적지 않다. 우리가 작품으로만 만나던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고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낀다는 설정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유의 판타지를 채워주었다. 영화나 소설, 미술작품 등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예술작품 속 배경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이자 작품을 보다 친밀하게 감상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명화들의 배경이 된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이가 있다. 현재 파리에서 활동 중인 화가이기도 한 지은이는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우연히 그림 속 현장을 발견하고 그 작품에 얽힌 사연, 화가의 삶, 자신의 경험 등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파리 도착 때부터 나는 꿈을 꿨다. 내가 이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알려줘야겠다는 꿈을.”
1980년대 말, 파리로 유학을 떠나 마주한 찬란한 문화 예술의 현장을 먼 고국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지은이가 파리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와 나누고자 하는 열정 하나로 단숨에 써 내려간 책이 바로 『화가들이 사랑한 파리』다. 처음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10여 년 전으로 출간 당시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새롭게 개정한 판본에는 파리 근교 노르망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던 부댕의 발자취와 그의 작품 현장을 비롯하여 예술을 통해 시대를 반영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한 들라크루아와 제리코의 삶과 작품을 추가하였고, 독자들이 작품 본래의 얼굴을 찾아가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보다 세심한 현장 검증을 거쳤다.
▶ 파리에 매혹된 어느 화가의 그림 현장 답사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파리에는 마티스, 피카소, 모네, 마네, 위트릴로, 세잔, 드가 등 근대미술의 거장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화가들은 인상주의, 상징주의, 입체주의 등 미술사의 주요 흐름이 탄생시켰고, 이를 토대로 파리는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비록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미술의 중심이 뉴욕으로 옮겨가기는 했지만 파리는 여전히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예술가들의 고향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서 수많은 예술가를 품에 안은 파리는 오랜 세월 무궁한 그림의 소재로 작품에 등장해왔다. 오늘날 파리의 명성은 일정 부분 유명화가들이 그린 파리 풍경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퐁뇌프, 몽마르트, 콩코르드 광장, 에펠탑, 센강 등 예술가들이 눈에 담고, 붓을 통해 화폭으로 옮긴 파리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캔버스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람들에게 꿈과 위안을 주고 있다.
“퐁뇌프에서 바라다보는 파리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실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처럼 표정이 다양하다. 안개 속의 에펠탑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센강을 배경으로 오르세미술관을 바라볼 때, 하루가 저물어 센강에 황혼이 내릴 때, 어스름한 달빛이 파리지앵의 귀가 시간을 알릴 때, 시테섬에 비가 내릴 때, 살포시 흰 눈이 내려앉을 때, 드넓은 하늘이 무수한 색채의 향연으로 눈부실 때…… 그것은 보고 또 봐도 언제나 감동을 선사하는 한 폭의 명화다.” (81쪽)
책은 쇠라의 에펠탑, 호크니의 퓌르스탕베르 광장 등 파리의 풍경을 그린 34명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 챕터마다 각 작품의 소재가 된 장소를 지은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작품 옆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그림 속 풍경과 실제의 장소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당시 화가들의 작업 의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 본연의 세계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통로가 되어준다.
“이 책은 내 마음속에 뒹구는, 말하자면 또 다른 보따리다. 여기에 실린 자료는 책을 내기 위해 작정하고 찾아다닌 게 아니라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틈틈이 모은 것들이다. 장소 역시 우연히 마주친 곳이 더 많았다. 이를테면 친구 집에 놀러가다가, 여름휴가를 보내다가, 산책하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를 얻었고, 오래된 문서, 친구와의 수다, 추억 등도 유익한 자료가 되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묘하게도 파리에서 내가 살았던 곳은 유명한 작가들이 살다간 동네였다.”(13~14쪽)
책의 표지에도 사용된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은 19세기 파리, 모스크바가의 비 내리는 오후를 포착한 것이다. 한때 모스크바가에 살았던 지은이로서는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 빨간 양탄자가 깔린 계단, 모딜리아니의 얼굴을 닮은 로맨틱하고 긴 창문 두 개와 예쁜 발코니에 반해 곧장 계약을 하고 몇 년 동안 머무른 소회를 밝힌 지은이는 그곳에 살면서 카유보트가 품었을 파리의 아름다움에 짙게 물들었다고 고백한다.
지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파리지앵에게 명화 속 풍경은 단순히 상상에서 비롯하고 감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며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티스와 피카소·루소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그렇고, 발튀스의 생탕드레 상점가, 쇠라와 들로네의 에펠탑, 만 레이의 페루가, 그리고 모네의 생라자르역 등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 대부분은 지금도 변함없이 파리지앵과 함께하고 있다. 그랑자트섬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몰라보게 변한 곳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품의 현장을 마주하면 마치 그림 속으로 빨려든 것 같은 착각이 인다.
▶ 화가의 눈으로 보는 명화, 그리고 파리
책은 현장 사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화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특정 인물을 사진과 실물로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면서 옛날 그대로인 것과 변한 것, 그 사이에 낀 세월의 두께와 절절한 사연 등이 작품 감상의 재미를 자극한다. 여기에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 관한 일화, 사랑과 우정, 지은이 개인의 체험 등이 한데 어우러져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유학 시절에 보고 느낀 것, 박물관 고문서에서 찾아낸 자료, 이웃에 살던 들로네의 손자에게서 들은 기증작 소송사건, 자코메티 작품 경매 참관과 거장들의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느낀 것 등은 화려한 무대 뒤 이야기처럼 읽는 재미를 더하는 한편으로, 거장과 작품에 얽힌 이야기 못지않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루소의 작품 「노트르담」 속의 장소를 찾기 위해 나는 네 번이나 주차를 다시 해야 했다. 분명 여기쯤이라고 생각하고 가보면 번번이 다른 곳이었다. 그러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겨우 루소의 작품과 꼭 닮은 곳을 찾을 수 있었다.”(48쪽)
이처럼 지은이는 작품의 현장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최대한 작품을 그릴 당시 화가의 시선에 맞추려 노력했고, 그렇게 찾아낸 장소를 독자들도 함께 조망할 수 있도록 각 글 끝에 명화 속 현장을 찾아가는 방법과 약도를 실었다. 지은이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화가와 같은 시점으로 풍경의 자태를 보고,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명화를 통해 받았던 감동을 다시금 음미할 수 있다.
“이 책이 파리 유학이나 여행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이들에게 작은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파리에 살면서도 변변한 여행을 다닐 수 없었던 이들이 자신의 추억을 정리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제라도 떠나고 싶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 직접 가보지 못해서 그저 환상만 키워온 사람들에게 작품 속의 풍경이 ‘작품과는 무관하고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그린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18~19쪽)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파리로 떠나 ‘작품을 그린 장소’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고픈 이들이 있다면 『화가들이 사랑한 파리』는 좋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