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성실하고 따뜻한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의 첫 산문집
“비평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울림 깊게 쓰면 안 되는 거잖아!”
_김종광(소설가)
기억은 큰 굴곡 없이 단정하고 가지런하다.
자랑할 것도 무람할 것도 없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천천히 돌아보며 가야겠다.
‘문학적’이 아닌 ‘인간적’인 자전을 조금은 덜 부끄럽게 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한 문학평론가의 격조 있은 첫 산문집
이 책은 수많은 문인과 독자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아온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가 1999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한 지 20년 만에 펴낸 첫 산문집이다. 국내에서 시집 해설을 가장 많이 쓴다는 평을 듣는 유 교수는 그동안 10여 권의 평론집과 학술서를 냈는데, 그 공로로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편운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시를 많이 읽고 해설까지 하는 국문과 교수가 쓴 산문은 어떠할까. 이번 산문집에서는 남의 글을 읽고 자기 글을 쓰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저자가 처음으로 자기 속내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유년이며, 중3 때 백일장에서 상을 받으며 문청으로 들어서게 된 이야기, 그리고 기억의 고고학자가 되겠노라 마음먹고 근대 문학의 정전을 파헤치며 연구자가 되고 교육자가 되기까지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글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또 어느 곳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는데, 특유의 단아한 문장에서 오는 따스함이 각별하다.
“이번 산문집을 계기로 나는 어쩌면 에세이스트를 꿈꾸는 도정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딱딱하고 규준이 정해져 있는 논문이나 평론에서 조금 비켜서면서, 나는 이러한 글쓰기가 비교적 자유롭고 또 경험적인 부분을 많이 개입시키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최대한의 장점으로 누렸다. 이제는 실험하며 물어보고 반성하고 몰두하며 집중하고 음미하는 과정으로서의 에세이를 가파르게 선호하게 될 것 같다.”
삶의 여정에서 배어난 아름다운 문장들
이 책은 기억의 저변에서 끌어올린 추억과 왕성한 비평 활동, 그리고 근대 문학 연구자로서 들려줄 수 있는 저자의 개성이 잘 발휘된 산문집이다. 오랜 시간 문학을 사랑해온 사람이 쓴 산문이기에 문장의 결이 지닌 섬세함이 어느 문학작품 못지않게 아름답다. 저자의 산문이 격조 높게 다가오는 데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가며 절제하듯 인용한 시편들도 한몫한다. 먼길을 떠나신 아버지를 추억할 때는 양주동과 김현승과 김수영 등의 애절한 시편을, 비표준화의 창조력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김영랑과 백석과 윤동주의 시편을,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선택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대목에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편을 인용한다.
어수선한 세상을 품고 새로움을 노래하다
모두 5부로 짜인 이 책 1부의 첫 꼭지는 미군부대에서 일하셨던 아버지의 부재와 기다림을 편지로 메우는 저자의 유년 및 문청 시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전적 글이다. 2부는 인생과 청춘과 사랑, 언어와 여행과 기억에 관한 사유의 글들을 실었다. 특히 언어에 대한 저자의 예민한 감각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3부는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한 문헌과 영화에 관한 에세이로, 우리 시대를 성찰하게 하는 고전들을 통해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들이다. 4부는 문학사에 남은 여러 인물들의 세계를 돌아보고, 우리 시대에 기록해가야 할 그분들의 어떤 정신적 고갱이에 대한 저자 나름의 견해를 만날 수 있다. 나혜석, 정지용, 채동선, 서정주, 윤동주, 마광수, 황현산, 기형도 등의 삶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5부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한, 성서에 관한 에세이나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관한 성찰의 글을 담았다. 이는 저자의 실존적 탐구와 고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결실이다.
*이 책은 초판 3천 부에 한해서 양장으로, 2쇄부터는 무선 제본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책 속으로
진정한 존경에는 공포나 억압이 아닌 연민과 자랑이 담겨 있는 법이다. _「아버지, 애잔하고도 깊은 이름」에서
우리의 생의 가치는, 분주한 일상이나 만나는 사람들의 머릿수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추억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흔적’의 활력과 온기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추억이 아무에게나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순간의 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에게만 남는 물방울의 ‘흔적’ 같은 것이니, 생의 추억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의욕적이고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일 것이다. _「생은 다른 곳에」에서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막상 청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청춘인지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청춘은, 청춘을 지나버린 사람들의 생에서 발견되는 어떤 지나온 흔적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춘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 생의 조건이 아니라, 청춘을 지난 사람들이 뒤늦게 발견하는 ‘기억’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_「청춘, 꿈을 꾸는 꿈」에서
사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좋은 동시를 읽음으로써 천진한 어린이의 눈빛으로, 세상에서 가장 더운 심장으로, 그리고 삶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신뢰와 희망으로 사람과 사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이고, 어린이날은 그런 어린 시절을 순간적으로 탈환해주는 날이기도 하다. _「우리 모두는 어린이」에서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길만 주어지고 그저 우리는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평화롭고 단조로울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 속에서 특유의 긴장과 활력을 가지는 법이다. 그런데 ‘선택’이 다른 것들의 ‘배제’나 ‘포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다른 것들을 배제하거나 포기하면서 ‘길’을 선택해간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자긍과 겸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어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없을 것인가. _「선택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서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현재형을 충실하게 자각하는 데 있다. 그 자발적 고통을 일러 우리는 ‘자기 성찰’ 혹은 ‘세계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와 지식이 근심을 점증(漸增)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_「‘헛됨’의 편재성과 ‘창조자’에 대한 기억」에서
결국 『진노의 잔』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폭력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을, 그 폭력에 대해 눈감고 성전 안으로 유폐된 신앙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잔혹함, 교만함에 대해, 그리고 불경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전언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노의 잔』은 파시즘의 폭력에 맞선 ‘신앙적 저항’의 역사적 국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이라 할 것이다. _「파시즘의 폭력에 맞선 ‘신앙적 저항’」에서
추천사
1부에서 화들짝 놀랐다. 비평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울림 깊게 쓰면 안 되는 거잖아! 2∼5부는 풍성한 어휘와 적확한 문장과 해박한 지식으로 수놓은 독서에세이. 다양한 텍스트와 시인들과 벌이는 단정한 연애담. 얼마든지 자전적인 글을 쓸 수도 있지만, 문학(특히 한국 시인과 시)에 평생 봉사하기로 맹약이라도 한 전사처럼, 뚜벅뚜벅 펼쳐온 ‘아득’한 ‘확장’의 외전. 소문난 모범비평가의 너무 공손한, 연민의 촉수가 몹시 발달한, 때로는 죽비 같은, 다정한 문학사랑담이 널리 빛나기를. _김종광(소설가)
누구나 “참으로 분망한 시간을 이어왔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기억에 대해 “큰 굴곡 없이 단정하고 가지런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랑할 것도 무람할 것도 없는 세월”에 대해 말하면서도 “나는 이제 천천히 돌아보며 가야겠다. 선생으로서, 지아비로서, 아비로서, ‘문학적’이 아닌 ‘인간적’인 자전을 조금은 덜 부끄럽게 쓰기 위해서”라는 오랜 다짐을 잊지 않고 있다.(「단정한 기억: 문학적 자전을 위하여」에서) 우리는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문학적’인 것은 ‘인간적’인 자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인간적’인 자전은 ‘문학적’인 시간들의 역사라고 말이다. _이은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