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자의 자기 관찰
심각한 트라우마가 고작 소음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독자들은 벌써 이렇게 의아해할지 모른다. 저자가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타인들은 원래 무관심하다. 전쟁의 참상을 겪고 돌아온 귀환병사에게도, 혹은 강간의 폭력에 몸서리치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여인에게도 그들은 ‘잊어버려라. 밝은 면을 보고 살아야지’라고 간단히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마음의 고통과 몸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저자를 진료한 의사들은 만성통증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 통증의학과 의사는 “당신은 지금 잘못 아프고 있는 거야. 이 병은 이런 식으로 아프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다닌 병원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책을 펴낸 지금도 그는 여전히 침을 맞으며 통증과 싸우고 있다.
의사나 상담사들이 학문적이고 직업적인 관점에서 트라우마에 접근했다면, 저자는 살기 위해 트라우마를 공부하면서 현실에서의 적용에 초점을 맞춰 이 책을 써내려갔다. 트라우마는 부지불식간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삶의 불청객이므로 현재진행형의 트라우마를 기록하여 전달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것이기에.
여전히 트라우마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말한 것처럼 어쩌면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쓰인 『안네의 일기』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20년간 삶을 초토화시킨 트라우마를 이겨내려고 가능한 일은 거의 모두 시도해보았다. 이사와 이직은 물론, 병원을 수없이 다녔고, 명상을 했으며, 심리학, 인문학, 종교학 등의 책을 강박적으로 읽었다.
흔히 책이나 영화를 통해 전쟁 경험이나, 강간, 아동기의 폭력 등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뤄지고 있지만 실제로 트라우마는 다양한 요인과 경로를 거쳐 발생한다. 저자의 트라우마는 사람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유형에 속한다. 이 때문에 그는 트라우마 자체보다 그러한 소외의 경험으로부터 더 큰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책은 이처럼 겹겹이 쌓인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위로의 방법론으로도 읽힐 것이다.
낮은 없고 밤만 있었던 세월
저자의 이야기는 1998년 IMF 즈음 한꺼번에 폭발하기 시작한 자신과 가족의 불행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모와 함께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려던 그 시기 ‘불행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을 입증하듯 아버지와 형이 응급실에 실려가며 차례로 병원에 입원했다. 또 당시 저자가 친형처럼 믿고 따르던 선배들에게 연이어 배신을 당하고 경제적인 부담까지 떠안는다. 이런 시간을 보내며 저자의 심신은 날로 피폐해져갔으나 병원에 입원한 가족들의 간병인이 되어 오히려 가족을 돌보는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그런 악전고투 끝에 2000년 즈음이 되자 그의 심신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이때 불쑥 ‘층간소음’이 삶에 끼어들었다. 바깥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겪었어도 집에서 충분한 휴식만 취할 수 있으면 심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저자는, 바로 그렇게 자신이 쉬어야 할 집에서 감당하기 힘든 소음에 시달리자 거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그런 상황에 적응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미 ‘소진 증후군’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들을 보이고 있었던 그는 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더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는 수도 없이 이사를 다녔다. 그러나 20년간 39번이나 해야 했던 이사는 그에게 사실상 ‘탈출’이었다. 아파트든 연립이든 맨 꼭대기 층, 맨 끝 집으로 이사를 가도 아랫집, 옆집 사람들은 그가 잠을 자야 할 때면 쿵쿵거리며 돌아다니고, 심야에 가구를 옮기거나 세탁기를 돌리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새벽에 술판을 벌이거나 벽에 못을 박고,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며 저자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과정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자 이것을 단지 ‘불운’의 문제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숙고하며 그는 자신의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불안을 자각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으나, 좌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의 통증과 기능 장애가 불안과 그 불안을 핵심으로 하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을 점점 자각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심리학 책이 그런 진실을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소음이 심각한 공동주택이라도 24시간 내내 소음이 있는 건 아닌데 저자는 24시간 내내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의 의사는 항불안제나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것 외에 다른 조처를 취하지 못했다. 그들은 현대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그를 ‘연약’하거나 ‘예민한’ 사람으로만 여겼다. 그처럼 병원에서조차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무엇에든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싸우려 하거나 아니면 그것에서 도망치려 할수록 그는 오히려 더 깊숙이 트라우마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만 했다.
마침내 2011년 몸과 마음은 극한 상태에 이르렀고 저자는 끔찍한 ‘공황 발작’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의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저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시해야 했다.
트라우마와 공감
저자는 트라우마를 ‘고액살마苦厄煞魔’라고 번역한다. 트라우마를 직접 겪으며, 그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시간 강박에 가까운 책읽기를 해야 했던 저자는, 자신의 그 경험을 이 번역어를 통해 짧게 요약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외부의 혹은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어떤 고통스러운 힘이며, 그럼에도 그 번뇌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미묘하면서도 압도적인 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트라우마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언급되는 ‘공감’이라는 가치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이 단순히 트라우마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공감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리고 싶어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주기를 원했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 과정은 길고도 험하며, 때로는 아주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이 기록들은 독자로 하여금 그를 이해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는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나의 친구에게’이다. 그의 트라우마에 공감해줄 수 있는 독자인 당신이 바로 이 편지를 받아볼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려는 걸까? 왜 너에게 내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나는 아직 너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너를 잘 모른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항상 쓰고 다니는 가면이란 게 얼마나 두껍고 우리의 본래 모습을 왜곡시켜놓는지 조금 알 뿐이다. 그러니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너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겠느냐? 그러나 우리 삶은 이런 터무니없음과 이것을 상대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것을 말하고 듣는 과정은 닮을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병들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병은 골수에 미쳤는데, 나는 그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낄 뿐이다. 극도의 불안과,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는 무기력이 나를 엄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한밤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있는 국경의 초병처럼 내게 왔다가 사라지는, 사라졌다가 또다시 나타나는 그림자들을 담담히 바라보며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짐을 ‘들어주는 것’은 같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무겁겠지만, 이 글을 읽는 너도 많이 무거울 것이다. (…) 그러나 아직 미숙한 첫 편지로 부디 나의 글을 읽어다오. 삭혀지지 않아 단단한 응어리로 남아 있는 기억과 생각들이 뿌연 도심의 하늘 밑을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내 마음속을 떠다니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