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기장의 위용
로마시는 수도의 위상에 맞추기라도 하듯 여러 개의 전차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경기장을 비롯해, 플라미니우스 경기장, 바티카누스 경기장, 바리아누스 경기장, 막센티우스 경기장 등이 있으며 이 경기장마다 온갖 우여곡절이 있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로마의 지배자들은 전차 경기장 건설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았다. 더 웅장하게, 더 화려하게 지은 경기장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다면 당대는 물론, 후대인도 오랫동안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카이사르처럼 신전을 지을 수도, 폼페이우스처럼 극장을 지을 수도 있지만, 매일같이 이용하고 극적인 재미까지 더해주는 전차 경기장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로마의 크고 작은 전차 경기장은 위대한 기념물을 남기고 싶은 지배자들의 열망의 산물이었다.
대경기장 바깥에 1층으로 된 주랑柱廊현관이 있었다. 여기에 가게들이 위치해 각종 음료나 기념품을 팔았다. 주랑의 가게를 통해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계단이 있어서 사람들이 편리하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축제가 열리는 날 주랑은 대목을 맞았다. 가판대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 경주가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퀴가 달린 말 모양 목제 장난감이었다. 목이나 말의 입 부근에 구멍을 뚫어 실을 매달아 끌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다른 아이들이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르기 마련이었다. 전차 모형의 목제 장난감이나 유명한 기수를 조각한 작은 인형도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전차 모형이나 기수 인형에는 전차 기수들의 팀을 상징하는 각각의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 색깔이 입혀진 물건을 사 갔다. 경주 장면이 그려진 도자기나 등잔은 어른들이 사는 물건이었다. 전차 경기장 안에서 경주를 보면서 끼니를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구운 빵,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과자류, 뜨거운 음식과 음료를 파는 가게들은 항상 붐볐다.
이 장에서 저자는 전차 경주로의 모습, 관객석과 계급별, 남녀, 직급별로 앉는 위치 등을 세부적으로 고찰한다.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기원전 43~기원후 18?)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경기장에서 연애의 기회를 잡을 것을 권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옆자리의 이성과 접촉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전차 경주의 운영 조직
기사, 평민, 해방 노예 중에서 돈을 가진 몇 명이 공동 출자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자본으로 기수를 고용하고 말을 사육하여 전차 경주에 내보낸 것이 경주용 팀 조직인 ‘팍티오factio’의 시작이었다. 팍티오라는 용어는 특정 색깔을 선호하는 관중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체제를 정치적 분파, 사회적 계층 분파, 군사적·종교적 연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들을 현대적인 의미의 단순한 ‘팬클럽’ 혹은 ‘경기장 도당’이라 보기도 한다.
전차 경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기수와 말을 출전시키는 횟수가 증가하고, 승리하여 돈을 벌 기회 역시 늘어났다. 자연히 기존의 소규모 팍티오가 돈과 사람을 끌어들여 대규모 자본과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팍티오 체제로 거듭났다. 과거 귀족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목적으로 참여했던 전차 경주가 이제는 비천한 출신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직업적인 활동이 되었다.
팍티오가 말과 기수뿐 아니라 마부, 회계원, 수의사까지 갖춘 하나의 조직이 된 것은 기원전 4세기 이후였을 것이다. 기원전 329년 출전하는 전차 기수의 수가 늘어나고 관중이 출발 시점에 관해 예민해지면서 부정 출발을 방지하기 위한 출발문이 만들어졌다. 이때 부정 출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공정성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항의할 수 있는 조직, 즉 거대한 팍티오 체제가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추측된다.
국가는 팍티오와 도급으로 계약했다. 기원전 214년 포에니 전쟁 비용으로 인해 국고가 텅 비자 감찰관들은 신전을 유지하거나 행렬에 사용되는 말을 공급하는 도급 계약을 금지했다. 국가가 말을 제공하는 개인이나 조직에 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전차 경주에서 조직적인 팍티오를 감찰관들은, 경주를 가능하게 하는 기구이면서도 국고 낭비를 유발하는 기구로 보았다.
전차 경주가 빈번하게 열리고 팍티오에 사람과 돈이 들끓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로마가 부유해지면서였다.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스 지역과 아프리카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전리품과 배상금, 조공 등 여러 명목의 돈이 로마로 들어왔다. 군사령관은 자신의 군공을 알리기 위해, 정무관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앞 다투어 전차 경주를 화려하게 개최했다. 그들에게는 권력 쟁취라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차 경주에 투자하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순수한 경주를 훨씬 뛰어넘어 남들보다 더 화려한 구경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진력했다.
전차 경주의 광경
황제가 수건을 버리는 동작을 하는 즉시 그는 출발문 위의 노예들에게 밧줄을 당겨 올리라고 소리쳤다. 출발 외침 소리를 들은 노예들은 밧줄을 당겨 올렸고, 이와 동시에 출발문이 열렸다. 기수들은 출발문에 막혀 출발 신호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트럼펫 취추자들의 소리에 의존했다. 또 콜로세움과 달리 차광막이 없다는 것은 눈부신 태양광과 숨 막히는 더운 열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햇빛이 반사되어 작은 수건만으로 관중이 모두 출발 신호를 알아차릴 수 없으므로 트럼펫을 불어 출발을 알렸다. 황제가 출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일어설 때, 수건을 떨어뜨릴 때 들리는 트럼펫 소리는 기수들에게는 심장 박동을 촉진하는 소리였다. 천천히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는 곧 출발 신호가 떨어질 것이니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기수들은 정해진 경주로를 따라 달리면서 속력을 늘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각자 초반에 가속도를 붙여야 지정 주로가 끝나자마자 중앙분리대 쪽으로 붙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쪽으로 달리면 거리가 짧아지므로 결정적으로 유리했다. 서로 안쪽 노선을 파고들려고 하니 선이 끝나는 동시에 치열한 몸싸움 아니 말싸움이 벌어졌다. 기수들은 채찍질하면서 말을 강하게 밀어붙여 안쪽 노선을 노렸다. 유리한 노선을 점했을 때는 속도를 올려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말들을 떨궈내는 데 진력을 다했다. 기수들의 의도는 채찍질을 통해 고스란히 말에게 전해졌다. 평소 말과 교감 훈련을 해온 만큼 이 순간 채찍질에 모든 마음을 담았다.
흥분하는 관중
6세기 초 청색과 녹색 팍티오에 대한 지지가 과열되다보니 상대 팍티오가 차지한 좌석을 구매하는 일이 일어났다. 상대 팍티오의 단결력을 저해하기 위해 좌석을 구매하는 것은 당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었
다. 이 역시 동일 팍티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좌석 배정으로 볼 때 같은 팍티오를 지지하며 같이 앉은 관중들끼리의 동질감은 상당히 높았다.
대경기장 바깥에서부터 자신이 지지하는 팍티오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공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2세기 녹색 팍티오를 지지하는 어떤 부자는 야생 새들을 잡아 머리에 녹색을 칠해서 우리에 가두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리에 갇힌 새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녹색 팍티오의 기수들이 승리하면 이 새들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풀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를 보지 않은 사람도 녹색 팍티오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만큼 열성적인 팍티오 지지자들은 자신과 팍티오를 동일시했다.
사라져버린 전차 경주
검투사 경기, 야생동물 사냥, 전차 경주 중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검투사 경기였다. 검투사 경기를 잔인함의 대명사로 본 교회는 이 경기를 폐지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교회는 검투사들과 검투사가 되려고 훈련하는 자들은 물론, 검투사 경기와 야생동물 사냥을 본 사람들도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했다. 검투사 경기 다음으로 없어진 것은 야생동물 사냥이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498년 야생동물과 인간의 싸움을 금지했지만, 야생동물들끼리의 싸움은 허용했다.
전차 경주는 검투사 경기와 야생동물 사냥이 사라진 뒤에도 존속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 재위)가 이교적인 종교와 의식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로마인에게 자신과 같은 기독교를 믿도록 명령했다. 명령과 달리 사람들이 이교 신전에서 여전히 제례를 하자 황제는 391년 이교 신전과 희생제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듬해에는 모든 종류의 이교 의식을 금지했다.
이교 신을 기리고, 희생제와 함께 시작된 전차 경주는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되고, 국교가 되면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시에서는 5세기에 정치 분열과 재정 악화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 500년에 로마시의 거주 인구는 10만 명이었다. 거주 인구 모두 대경기장에 간다고 해도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채우지 못했다. 하루 개최하는 경주의 수는 8회로 줄어들었다. 관중과 인기가 줄어들면서 전차 기수가 되려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오랜 훈련과 경험을 축적한 전차 기수가 나타나지 않았고, 유명한 기수가 없자 인기는 더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