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기가 열네 살이었던 때를.”
어느덧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의 온화하고 투명했던 첫 순간들
열네 살 안나의 촘촘한 일상을 읽다 보면 아련히 잊고 있던 중학교 시절의 감각이 생생히 떠오른다. 보건실에서 누워 있을 때 내 몸이 왠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던 생경한 기분, 대화를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했던 선배를 몰래 짝사랑하던 마음, 무리에서 동떨어져 혼자 있을 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중학교에서의 긴장감, 또 때로는 어른들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유쾌한 열네 살 여학생을 연기했던 그때의 감정들처럼. 소설 속 장면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들을 일깨우며 독자를 다른 우주로 초대한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른은 어쩌면 거의 없지 않을까 싶어. 자기도 모르게 어른이라고 불리기 시작해서 다들 꽤 놀라지 않았을까.”
_본문 72쪽
마스다 미리의 우주에서 우리는 순수한 ‘첫’ 마음들에 미소 짓게 된다. 처음이라 마음껏 솔직했고 마음껏 기뻐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동시에 처음이라 온 마음을 다해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때. 열네 살이 지닌 풍부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보면 이제는 중견 작가인 마스다 미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하고 놀라게 된다. 어른과 아이의 마음의 경계선을 두지 않고, 모든 어른들에게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전부 다 어른인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마스다 미리는 이번에도 우리가 놓치고 있던 드넓은 마음의 스펙트럼을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담아냈다.
“어른이 되는 순간에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까?”
“순간이라. 글쎄다, 순간적으로 어른이 되진 않을 거 같은데?”
_본문 83쪽
“우리의 마음은 수성이나 보름달이나 토성 고리로 흘러넘칠 만큼 가득하다.”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우주의 근사함, 그리고 우리의 특별함
우주에 대해 마지막으로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언제일까.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 우주. 분명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우주의 존재 따위를 고민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도대체 우주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당장 오늘의 일들도 힘든데 그런 고민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마스다 미리는 “별의 죽음은 우리와 관계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오늘 밤에 본 별하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고 답한다.
“이 하늘에는 오늘 밤 죽는 별도 있고 지금 태어나는 별도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안.
누군가와 오늘 밤에 본 별하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지 않니?”
_본문 192쪽
안나의 일상에 끼어드는 오빠의 뜬금없는 우주 이야기는 엉뚱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안나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안나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노닷치를 안타까워할 때 오빠는 명왕성의 이야기를 꺼내며 “행성에서 퇴출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별인 명왕성은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는 걸 일깨우고, 매일 상처를 겪어야 하는 사람과 달리 “별은 가만히 있어도 되니까 좋겠다”고 말하는 안나에게 모든 별과 우주의 만물 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힘이 들어도 공전하며 스스로의 몫을 해내고 있는 토성은 그 증거로 지구에서 15년 주기로 고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한다.
마스다 미리의 소설 속에서 일상과 우주의 이야기는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며, 영원하다고 느껴지는 우주에도 시작과 변화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라는 존재 역시 수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마음과 현상들을 실감하는 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안나의 토성》을 읽다 보면 이 드넓은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하나는 이 우주와 맞먹는 기적 같은 존재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스다 미리의 별처럼 빛나는 위로는 우주 속 유일한 별인 우리에게로 와 닿는다.
“우주의 수수께끼가 조금 해결되었다고 해서 그게 우리한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
그래도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떠나 알고 싶다는 갈망을 숭고하게 여기는 점이 대단한 거야.”
_본문 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