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테마로 한 산문집의 정수, 함성호의 『허무의 기록』 출간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건축평론가로서, 또한 문화 전반에 관한 전방위적 비평가로서 활발한 활 동을 펼치고 있는 함성호가 여행 산문집 『허무의 기록』을 펴냈다.
얼마 전 중국과 티베트를 거쳐 인도와 태국까지 홀홀단신으로 배낭 여행을 다녀온 그가 그 체험 의 생생한 기록으로 펴낸 이 산문집은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은 물론이고 건축평론 가로서의 전문적인 식견까지 겹쳐 독특한 울림을 전해준다. 낯설디낯선 이국의 험한 땅에서 때로 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까지 애초의 일정보다 육 개월 가량 지체하며 갖은 고초와 흥미로운 일들을 겪은 그는 그곳의 사람들과 문물, 그리고 풍속의 세세한 일면까지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낱낱을 유장한 필치로 그려 보이고 있다.
일찍이 여행을 테마로 한 산문집이 여러 권 있었지만, 이 『허무의 기록』만큼 여행이 담보할 수 있는 낭만과 운치, 모험과 발견을 제대로 표현한 산문집은 결코 흔치 않다고 할 것이다. 이국의 풍물과 습속의 상세한 소개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여행 지침서로서, 길 위에서의 존재론 적 고뇌와 글쓰기의 고민을 진지하게 탐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빼어난 문학적 에세이로서 기능 하는 이 책은 여행 즉 ‘떠돎의 미학’을 테마로 한 산문집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함성호는 1963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199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 평론이 당선 되어 건축평론가로도 활동중이다. 현재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 으로 문화 전반을 다루는 무크지 발간에 참여하고 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이 있다.
영혼의 고원을 등정하는 시인 함성호의 바람의 서사시
제목이 암시하는 바, 함성호의 이 산문집은 ‘허무’를 좇아가는 바람의 기록이다. 티베트의 황량 한 벌판을 바람과 함께 떠돌며 그는 바람 속에서 고독을 발견하고 고독 속에서 신(神)의 목소리 를 듣는다. 성스러운 불결함의 땅 티베트, 폐허 같은 그곳에 바람이 분다. 오직 바람만이 지나간 다. 그 바람에 오색의 타르쵸(‘헝겊 쪼가리’라는 뜻, 티베트 불교의 경전)가 펄럭인다. 바람은 티베트의 생명이다. 황량한 벌판을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그는 “위대한 폐허”를 발견한다. “가 서 그 위대한 폐허를 보라. 거기에서 죽으라. 허무해져라, 진정으로 허무해져라. 허무의 빛을 보 라. 바람은 고원의 벌판을 지나 그대의 골통을 내리친다. 빛은 폭사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허무”에 안착한다. 그것은 곧 자유다. “진정으로 운명에 몸을 맡긴 자 만이 완전히 자유롭다.”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떠난 그의 여행에서 진정한 동반자는 인간이 아니라, 허무와 자유, 그리고 바람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기록은 황량한 고원에 부는 바람의 기록이다. 천국의 경치같이 황홀 한, 그러나 산소가 부족한 저 낯선 땅의 풍경과 문물이 그의 유려한 문체와 탁월한 감식안에 포 착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꿈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영혼의 고원을 고독과 허무와 함께 등정하는 시인 함성호의 바람의 서사시, 바로 그것이 산문집 『허무의 기록』이다.
섬세한 관찰과 빼어난 문장, 그리고 탁월한 감식안
시인의 감성과 건축가의 시선이 교직하면서 이루어낸 이 산문집은 곳곳에서 미(美)와 종교의 발 원지, 그리고 삶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제(制)에 대한 깊은 천착을 보이는가 하면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현지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등 여행지 곳곳에서 의미 있는 물음들을 제시하고 있다.
티베트의 수도인 라사의 포달라궁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심미안은 함성호의 건축가적 풍모를 증 명하는 압권을 이룬다. 거대한 회벽의 건축물인 포달라궁의 수많은 방,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 그 복도가 끌어들이는 교묘한 빛의 이끌림―함성호는 이 포달라궁에 대한 묘사와 감탄을 여러 번 되 풀이하고 있는데, 거대한 궁전의 저 깊은 속까지 빛을 실어나르는 복도를 ‘빛의 복도’로 표현 함으로써 인공이 건축한 하나의 자연, 자연에 반한(홀린) 위대한 구축으로 포달라궁을 규정하고 있다. 이 부분은 어둠과 빛의 조화와 대립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과 빼어난 수사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라사 제일의 성지인 조캉 사원, 끝없는 잡목숲으로 뒤덮힌 인도 카트만두의 룸비니 동산, 무 굴 제국 건축 예술의 정화를 이루는 타지마할 궁전 등에 대한 그의 지성적 관찰은 책읽기의 즐거 움을 선사한다. 특히 타지마할 궁전의 건설에 얽힌 일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돌아 보게 한다 : 샤 자한 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지어달라는 왕비의 유언에 따라 세계 의 모든 예술가들을 불러 이 무덤을 축조한 후, 다시는 이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 도록 하기 위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여야 하므로) 동원된 모든 장인들의 손목을 잘 라버린다. 타지마할 궁전은 그렇게 태어났다. 함성호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마조히즘과 탐미주 의의 극치라고 말한다.
세계의 중심, 모든 여행자의 꿈인 곳―카일라스
여행중에 함성호는 최종 목적지로 카일라스 산을 택한다. 우리에게 수미산으로 잘 알려진 이 산 은 힌두와 불교의 성지이며, 두 개의 성스러운 호소(湖沼)가 산을 중심으로 태극의 모양을 하고 떠돈다는 환상의 산이다. 세계의 중심이라 일컫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자의 꿈 인 곳이다. 함성호는 이곳을 “내 세계의 중심이며, 내가 꿈꾸던 모든 신화, 그 모순 없는 세계로 의 여행지”라고 말한다.
그는 다시 천국의 풍경 같은 티베트-네팔 국경을 지난다. 전설에 의하면 네팔은 넓은 호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문수보살이 물을 말려 협곡을 드러냄으로써 네팔이라는 국토가 탄생했다. 설인(雪人) ‘예티’의 이야기가 아직도 전설로 전해져온다고 하는 히말라야는 네팔어로는 ‘히 마 알라야’이다. ‘죽음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
티베트와 인도, 그리고 네팔의 위대한 건축물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그곳의 풍속묘사들도 특 이한 것이 많다 :라사의 밤은 개들의 천국이다. 그런데 라사의 개들은 모두 성병에 걸려 있어 어 떤 놈은 자궁이 완전히 빠져나와 길 위에 자신의 성기를 질질 끌고 다니고, 어떤 놈은 시뻘건 생 식기를 건들대며 고통스럽게 다니고 한다. 라사에서는 음식물을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들이 그것을 다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개에게는 ‘천국’이 아닐 수 없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거지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티베트에서는 구걸을 반장난으로, 구걸 행위 자체를 재미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인도의 구걸은 맡겨놓은 돈 찾아가는 것처럼 뻔뻔하고 당당하다.
길을 떠나라, 그리하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으리라
그의 여행에는 고초도 많았다. 우선 한 달 기약하고 시작한 여행이 육 개월로 늘어나자 고향 집 가족들은 실종 신고를 하고 혹여 북에 납치된 것이 아닌가 싶어 대공 수사과에 의뢰해놓기도 하 였다고 한다. 속옷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히말라야를 오르기도 했으며, 고소병에 걸려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티베트에 먹고살기 위해 이주한 조선족 동포를 만나 타국살이의 한을 달 래기도 하고, 사기로 빈털털이가 되어 오도가도 못 해 여행길에 만난 동반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 산문집에 등장하는 여행 동반자들은 요기, 포대 화상, 조끼 입은 사내, 콧수염, 어눌한 말투, 날카로운 동그란 안경, 점찍은 이마 등 특징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무역업을 하는 오퍼상으로 비자를 위조하여 중국에 입국함으로써 시작된 함성호의 여행은 티베트 와 인도, 네팔을 거쳐 태국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행장이라곤 조그만 책가방에 내의 두 벌과 바지 두 벌, 간단한 세면도구, 달라이 라마의 저서 한 권이 전부였다. 그의 여행은 정처없는 떠돎 이었고, “친숙한 낯섦”에 대한 경외였다. 고통과 외로움과 이질감을 동반하는 여행이었으므로 술과 환각이 그의 옆에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를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던 허무는 또한 위안이기 도 했다. “길이야말로 모든 허무에 대하여 위안이다. 길이 나를 위로하였다. 나는 길이 있는 한 기꺼이 허무에 머무르리라”라고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괴테는 “길을 떠날 때는 언제나 과거의 모든 이별과 미래의 마지막 이별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 에 떠오르는 법이다”라고 했다. 함성호는 이 여행기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그대’ 혹은 ‘너 ’라고 호칭되는 한 여인을 떠올린다. “그대가 아니고는 나의 둥지란 이렇듯 미약하다.” 그는 티베트의 황량한 고원에서 과거의 이별을 떠올리며 바람의 갈피에서 옛 추억의 흔적을 전해듣고 있는 것일까? 그의 ‘허무의 기록’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압축되고 있다. “떠돌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헤매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