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
‘조형 유전자’ 감식으로 찾아낸 조선민화의 두 천재 작가
기하학적인 책거리 천재 작가와 모든 화목(畵目)에 만능인 천재 작가의 작품 33점
“민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민화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사물과 형상을 어떻게 해석하여 독자적인 조형관으로 표현했는가다. 나는 민화 작가가 그린 민화를 회화적인 관점으로 보고, 순수미술로 대한다.”(「나에게 민화란 무엇인가?」에서)
민화는 무명성과 실용성이라는 낙인 탓에 민예품의 사슬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통 회화사에서도 작가를 알 수 없는데다가 집안의 크고 작은 행사에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유물이라 여겨 민화를 제외한다. 하지만 저자는 민화를 회화로 보고 즐긴다. 민화 중에는 민예적이고 허접한 작품도 있지만 작가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일부는 회화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 책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그려진 ‘조선민화’에 주목하고, ‘조형 유전자(DNA)’ 감식으로 찾아낸 두 천재 작가의 존재를 33점의 작품으로 실증해보인다.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1957년에 발표한 「조선시대의 민화」에서 조선의 ‘속화(俗畵)’를 ‘민화(民畵)’로 명명한 후 65년여만의 일이다.
회화적인 관점으로, 민화의 ‘어떻게’에 주목하다
저자는 ‘민화는 회화다’라는 관점으로 20년 넘게 민화를 수집해온 컬렉터다. 민화 외의 고미술 수집 경력까지 치면 40여 년간 컬렉터의 길을 걸어왔다. 2018년에는 자신의 민화 수집품으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전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6개월여 동안 순회전 <김세종 민화컬렉션ㅡ판타지아 조선>을 가지며, 민화 수집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다.
저자는 민화를 민예가 아닌 순수 회화로 감상한다. 그동안의 민화 감상이 화폭에 ‘무엇을 표현했는가’ 하는 상징성 찾기에 쏠려 조형적인 측면을 등한시해왔다면, 저자는 소재를 ‘어떻게 표현했는가’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작가의 창작품으로서 민화의 조형미를 탐닉한다.
“민화 예술의 근본은 무엇을 그렸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렸냐가 아닐까 한다. 역사적인 연구나 상징성에 대한 논의에 편중되면, 민화가 아름다운 미술로, 회화적인 관점으로 감상하는데 그것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지금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어떻게 그렸는지에 주목할 때다. 내용에서 형식으로, 상징성에서 회화성으로 관점의 이동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민화에 대한 균형 잡힌,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61-63쪽)
저자가 두 명의 천재 작가를 발견한 것도, 집요한 수집 체험과 진득한 감상의 결실이다. 민화는 야나기가 특색으로 언급한 ‘무명화가’의 그림이라는 논리에 갇혀, 우리나라에서조차 푸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 3대 미술관의 하나인 시카고미술관의 주요 컬렉션 도록에는 폴 세잔(1839~1906), 빈센트 반 고흐(1853~90), 조르주 쇠라(1859~91) 등의 작품과 책거리가 나란히 실려서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는 무명화가의 작품일지언정, 해외에서는 저자처럼 조선민화 책거리를 회화로 보고 작품성으로 평가한다는 뜻이다. 이 책거리 작품이 바로 자자가 발견한 책거리 천재 작가의 작품이다.
호랑이는 사후에 가죽을 남기지만 작가는 사후에 작품을 남긴다. ‘작가’가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라면, 작품은 곧 작가가 된다. 민화는 흔히 무명의 떠돌이 작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화 작가들이 작품에 낙관 같은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신을 다해서 그린 작품만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남았다. 저자는 이들 중 작품성이 뛰어난 일부는 익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작가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자신을 감추었다고 말이다. 동양미술사에서는 작가의 익명성이 예술적인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익명성으로 인해, 작품을 시대나 민족적 미감이 깃든 조형의 보고로 여겼다. 도자사(陶瓷史)가 ‘인명 없는 미술사’로는 대표적인데, 민화도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다. 한결같은 솜씨와 수준의 작품들은 익명성에 무게를 싣고, 시대의 미감을 한 차원 승화시킨 작가의 존재를 당당하게 증언한다.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자 조형적 진술이고, 사상(思想)이다. 익명성의 조선민화는 작가를 통해 작품으로 나아가기보다 작품을 통해 작가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조선민화는 상징물의 집합체로 보는 데서 벗어나 회화로, 작품성으로 감상할 필요가 있다. 답을 찾듯이 소재의 상징성을 좇다보면, 풍부한 회화성을 놓칠 수가 있다.
조선민화의 현실과 두 천재 작가와의 인연
조선민화의 미스터리 천재 작가 두 명을 소개하는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격인 「나는 조선민화의 천재 작가를 찾았다」에서는 조선민화에 대한 생각과 수집이야기를 들려준 뒤, 두 명의 조선민화 천재 작가와의 인연을 밝힌다. 2부 격인 「조선민화의 책거리 천재 작가를 만나다」와 3부 격인 「조선민화의 모든 장르를 그린 천재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두 천재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조형적인 동질성을 자세히 짚어준다. 책의 비중은 2,3부에 실려 있다.
먼저, 1부는 조선민화와 궁중민화(궁중화), 민화의 영문표기 문제, 수집 철학, 조선민화 대중화의 걸림돌, 민화의 세계화 등에 관한 생각을 피력한다. 그리고 두 천재 작가와의 우연한 만남과 경이로움을 들려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민화를, 오늘날의 ‘현대민화’와 구분 짓고 화려한 ‘궁중민화’와 구별하기 위해 ‘조선민화’로 지칭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한 지붕 두 가족’꼴로 어정쩡하게 묶여 있는 조선민화와 궁중민화를 서로 독립시켜 제자리를 찾아줄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천재 작가의 발견은 기이한 책거리 병풍과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완전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조형된 문제의 책거리는 저자가 한번도 같은 유형을 본 적이 없는 불가사의한 작품이었다. 홀린 듯이 구입하고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한 달 후에 병풍을 펼쳐보고, 수많은 민화 도록을 뒤졌다고 한다. 동일한 유형의 책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품에서 같은 종류의 책거리를 접하고, 이 걸출한 책거리 천재 작가의 작품을 눈에 띄는 대로 수집하고 도판을 모은다.
조선민화의 모든 장르(畵目)에서 재능을 보인 천재 작가와의 인연도 운명적이었다. 그의 ‘화조도’를 마음에 둔 지 18년만에, 작품 스타일이 전혀 다른 이 작가의 ‘문자도’와 만난다. 비록 그림의 유형은 화조도와 다른 문자도였지만 저자는 직관적으로 같은 작가의 솜씨임을 알아본다. 그리고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두 작품의 조형적인 동질성을 비교해보니, 분명 조형 유전자가 같은 혈육이었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자신이 소장한 민화와 민화 도록에서 열댓 점의 작품을 찾아낸다.
기하학적인 추상의 책거리 천재 작가
2부는 앞서 언급한, 책거리에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주는 천재 작가(이하 ‘책거리 천재 작가’로 약칭) 편이다. 저자는 기하학적인 선묘 구사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책거리 작품을 수집하며,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동일한 스타일의 책거리를 모아서 자세히 관찰한 결과, 같은 작가의 작품을 밝혀낸다. 그렇게 찾아낸 책거리가 18점이다. 이들 작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탓에, 같은 작가의 작품임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개인, 갤러리, 조선민화박물관, 가회민화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미술관, 기메동양박물관 등이 주요 소장처이다. 관찰 방법은 한 작가의 특성이 담긴 조형 유전자를 추출하여 비교하는 식이었다. 마치 유전자 감식으로 친자를 확인하듯이 동일한 조형 유전자를 찾아서 제시한다.
“나는 작가의 고유한 손맛이 담긴 이미지를 ‘조형 유전자’라고 일컫는다. 익명성을 표방했더라도 작가는 지문처럼 화면 곳곳에 자신의 조형적 취향과 습관을 흘린다. 그 흔적을 찾아 대조하고 비교해 보면, 특유의 표현방식이 낳은 조형적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다.”(398쪽)
저자는 자신이 찾아낸 조형적인 특징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독자가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게 같은 유형을 모아서 수많은 도판으로 편집했다. 단 한 점도 동일한 작품이 없는 정교한 선묘와 문양의 현대적인 감각과 구성력에 거듭 감탄하게 된다.
“이들 책거리는 이 천재 작가의 천부적인 창의력과 구성력, 표현력, 그리고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궈낸 조선민화의 기하학적인 조형 유토피아다.”(191쪽)
이 책에서 저자는 기하학적인 바둑판 문양과 세련된 조형 구성의 비교, 화병, 과일과 채소쟁반, 새, 문양, 깃털, 대나무 같은 표현의 동질성을 구체적인 도판으로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독자는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책거리 천재 작가의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화의 전 장르에 만능인 천재 작가
3부는 조선민화의 전 장르에 능한 만능 천재 작가(이하 ‘만능형 천재 작가’로 약칭) 편이다. 이 작가는 화조도, 문자도, 구운몽도, 산수화조, 산신도 등 작품의 화목과 표현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 조형어법에서도 꼼꼼하게 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같은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 않는 어눌한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제각각으로 보이는 이들 작품에서 동일한 조형 유전자를 찾아서, 한 작가의 작품으로 묶는다. 지금까지 발견한 작품이, 『이조의 민화』(일본 고단샤, 1982)에 실린 유명한 화조도 병풍을 포함하여 15점이나 된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동질성을 찾으려 할 때 중점적으로 관찰한 것은 꽃이다. 꽃의 표현이 특이했다. 꽃을 그냥 꽃으로 그리지 않는다. 꽃과 꽃을 연결하되 그 중심을 선으로 꿰거나 꽃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의 가지에 그 반쪽짜리 꽃을 좌우로 어긋나게 붙여서 묘한 리듬을 만든다. 꽃을 추상화하여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다.”(422쪽)
작가는 저마다 특유의 취향이나 조형어법이 있어서,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표출된다. 작가는 타인이 흉내낼 수 없는 개성적인 ‘수적(手跡, manner)’으로, 비로소 작가로 등극한다. 이름을 숨기거나 이름이 없더라도 조형어법을 보면, 해당 작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수많은 민화를 수집해온 저자는 직관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작품들의 조형 유전자를 찾아냈다. 만능형 천재 작가만이 표현 가능한 모티브나 선과 색, 구성에 깃든 조형 유전자를 뽑아서 작품과 작품의 연결고리를 찾아 조형적 핏줄을 증명했다. 그래서 독자는 화조도와 문자도, 문자도와 문자도, 꽃과 꽃잎, 새 그림 사이의 동질성, 토대 위에 꽃과 나무를 그리는 동질성을 비교하며,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즐길 수 있다.
‘책거리 천재 작가’와 ‘만능형 천재 작가’의 걸출한 작품세계
이들 책거리 천재 작가와 만능형 천재 작가는 작품 스타일이 대조적이다. 책거리 천재 작가가 하나의 화목을 깊게 파고드는 스타일이라면, 만능형 천재 작가는 여러 화목을 넘나들며 넓게 펼치는 스타일이다. 책거리 천재 작가가 심화형이라면, 만능형 천재 작가는 확장형이다. 책거리 천재 작가의 필치가 정교하다면, 만능형 천재 작가는 자유분방하다. 그럼에도 두 천재 작가의 작품세계에는 공통적으로, 같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 두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편안한 길을 답습하기보다 도전하듯이 기존의 작품과 다른 작품을 창작한다. 이는 이들이 투철한 작가의식의 소유자임을 의미한다.
민화 컬렉터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두 천재 작가의 존재를 찾아낸 저자는, 관련 학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연구를 기대하며 이렇게 밝힌다.
“만약 작품의 조형적 유전자를 통해 작품성을 확인하고, 그들을 작가로 인정한다면, 조선민화는 강고한 민예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회화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회화작품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이고 희망이다.”(11쪽)
추천사
“19세기 조선 말엽에 활약한 민화의 천재 화가를 찾았다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한 두 천재 화가의 작품과 그 속에 담겼을 내밀한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록된 작품에 나타난 극치의 창의적인 회화성은 천재 화가라는 칭호도 부족하다. 이보다 훨씬 상위 개념으로 불러야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세계 회화사에 당당히 올려야 할 두 천재 화가와 작품을 발굴해 내고 나름의 논리로 증명하는 저자의 혜안과 노력에 격려를 보낸다. 부디 우리 민화에 대한 저자의 실증적 노력이 이 책을 통해 많은 지지를 받고, 세계 미술계의 자각을 이끌어내길 바란다.”(화가 소산 박대성)
“예술가 없이 예술작품이 나올 수는 없지만 작품의 평가에서 예술가의 이름이 절대조건이어서도 안 된다. 김세종 선생은 작가의 이름이 없는 작품을 모으고 분류한 후, 특정 예술가의 작품을 걸러내 ‘군(群)’을 이루었다. 이러한 작품군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그 특정 예술가가 한때 이 땅에서 활동한 열정적 화가였음을, 그 별난 스타일을 우리 선조들이 아끼어 거듭 요구했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의 열정적 수집 활동이 아니라면 얻어낼 수 없는 보배로운 결과다. 수집가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이 책은 향후 예술가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고, 창의적 수집가의 좋은 본보기로 남을 것이다.”(미술사가 고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