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편의점 손님들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각자의 색깔이 선명하다. 첫 등장인물인 ‘라면 소년’은 학원 때문에 도대체 결혼할 시간이 없다며 한숨을 푹푹 내쉰다. 어떤 초등학생 자매는 재영씨를 ‘재영띠’라 부르며 손님들에게 재영씨가 자기네 엄마라고 장난을 치고, 개구리 군복을 입고 매일 담배를 두 갑씩 사는 다섯 아이의 이모(!) ‘김 병장’은 특유의 군인 같은 말투와 행동으로 뭇사람들의 눈길을 잡아챈다. 김 병장이 여자라는 사실에 기함했던 ‘볼 빨간 아주머니’는 언제부턴가 그의 러닝메이트가 됐다. 편의점의 ‘꽃보다 할매’ 3인방은 올 때마다 재영씨와 시트콤처럼 톡톡 튀는 대화를 나누며, 미역이나 잡채나 떡을 가져다준다. 그중 흑룡강에서 온 ‘용녀’ 할머니의 카리스마는 책을 덮고도 한참 뇌리에 남는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재영씨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무슨 담배를 좋아하는지, 무슨 술을 좋아하는지, 어느 크기 봉지를 선호하는지 등을 알아두는 것은 기본이다. 날카로운 눈으로 특징을 잡아내 ‘어설러’ ‘일용엄니’ ‘호빵맨’ ‘참새와 할미꽃’ 같은 별명을 붙여준 것도 이 책의 묘한 매력이다. 재영씨의 관심과 애정은 별명에서 그치지 않고, 스마트폰에 쩔쩔매는 것을 도와주거나 억울한 일 하소연을 들어주는 등 점원과 손님 이상의 관계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 심지어 중국 출신 이주노동자가 세금 신고 때문에 난감해하는 것을 보고 그의 회사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도와주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계산대에 가만 앉아 눈을 반짝이며 진열대 사이의 손님들을 바라보는 재영씨의 모습이 그려진다. 손님 한 명 한 명이 저도 모르게 품고 있는 빛깔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별별 일을 다 도와주는 것도 단순한 직업정신의 발로라기보다, 그 빛깔을 소중히 여기고 관계를 맺다보니 어느샌가 마음을 열게 되어서가 아닐까.
계산대에서 만난 달콤한 이야기, 씁쓸한 사연들
편의점은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와 속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만화경이기도 하다. 재영씨는 때로는 먼저 다가가 이야기를 끌어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화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사연을 조심스레 짐작하기도 한다. 이따금 담배를 사러 오는 택배원이 사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담배 셔틀’이었다거나, 재영씨를 졸졸 따라다니며 밝은 모습만 보이던 열두 살짜리 소녀가 알고 보니 오빠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있었다거나, 매일 술을 먹어 건강이 나빠진 아저씨가 결국 고향에 가자마자 세상을 떠났다거나 하는 등, 편의점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연들이 흘러들어온다.
재영씨가 직접 겪은 일들도 편의점 이야기에 구체성을 더해준다. 특히 ‘진상’ 손님 이야기는 더없이 사실적이고 자세해서 직접 계산대에 서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만취한 채로 ‘요즘 것들은’ 레퍼토리를 늘어놓다가 경찰에게 끌려나가며 ‘담배 한 갑 줘!’라고 외치는 아저씨는 귀엽기라도 하다. 유통기한이 지났다며 재영씨에게 상품을 집어던지는 손님도 있고, 보자마자 하대하고 욕설을 뱉는 전형적인 ‘갑질’ 손님도 있다. 돌연 망치를 들고 들어온 사람 때문에 경찰을 부른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할 사람을 만나 편의점에 데리고 온 단골 청년, 손주를 위해 포켓몬 빵을 찾는 멋진 할아버지, 남편과 사별하고 슬피 울다가도 생전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며 재영씨를 붙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갖고 오는 사람도 많다. 더군다나 ‘60대 되면 진짜 귀가 순해져요?’라는 말에 ‘40이 되어보니 유혹에 안 흔들리디?’라고 받아치는 손님을 보고 있자면, 웃음을 연발하는 이 시트콤 연속극에 재영씨와 함께 등장인물로 출연하고 싶어진다.
편의점에서 우리는 모두 ‘한통속’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을 찾으러 온 듯 들어와서는 무엇인가 비닐봉지에 담아가지만 그 짧은 순간에 몇 마디의 말과 표정으로 그들의 감정을 흘리고 간다. 때론 그것이 반복되어 서로에게 인식되고 이렇게 이야기가 쌓여가곤 했다.”_261쪽
이 책을 읽다보면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편의점에는 예기치 못한 마주침,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가득하다. 재영씨는 손님들이 저도 모르게 흘리고 가는 감정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끌어모은다. 그 과정에서 손님들은 그저 잠깐 다녀가는 타인이 아닌, 저마다의 리듬으로 살아 숨쉬는 생생한 실체가 된다. 거기서 관계가 발생하고, 세상은 좀더 다양한 색깔로 그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다.
재영씨는 편의점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한통속’이라 말한다. ‘이웃’이라는 뜻이라면서. 우리는 사실 ‘한통속’인 서로를 너무도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게 아닐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이 책을 덮고 나면 편의점에서 스쳐 지나는 타인들이 그저 타인으로만 보이지 않게 된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다채로운 마음을, 우리는 좀더 반짝이는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