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마음으로 귀 기울인 동시의 목소리
「책머리에」의 첫 문장, “오늘은 반점도 온점도 없이 쓰고 싶어”는 동시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의 태도를 넌지시 가리켜 보이는 것만 같다. 반점도, 온점도 없이 쓰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어느 글도 사랑 아니면서 쓴 글은 없다”라고 말하며 해설의 첫 문장이 풀려나오기까지 수없이 읽고 녹음하여 듣고 필사하기를 반복했다는 저자의 고백을 읽고 나면 그 간절한 바람의 속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설익은 논리를 잇기 위해 자꾸 멈칫거리는 글쓰기가 아니라, 모든 사유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노랫말처럼 절로 흘러나오는 글쓰기. 저자는 억지로 기운 자리가 없어 산뜻하고도 사뿐한 글쓰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당신의 이름을, 당신에게 알맞은 목소리로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토록 지극한 마음으로 귀 기울인 동시의 목소리가 바로 『천천히 오는 기쁨』에 담겨 있다.
마침내 오고야 마는 순수한 기쁨
본문은 총론 격인 ‘이야기를 시작하며’와 3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놓인 글, 「초대와 환대의 동시-판을 위하여」에서는 1990년대 말 이후 동시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텍스트의 리스트를 제시한다. 선정 기준은 ‘전통적인 동시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냈는가’이다. 겨레아동문학연구회에서 엮은 근대 동화·동시 선집 『겨레아동문학선집』, ‘독보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시인 류선열의 유고 동시집 『샛강 아이』,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던 동시 동네를 일깨운 김이구의 평론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꾸준하게 시인을 발굴하고 시단의 시인을 초대해 온 여러 출판사의 동시집 시리즈, 동시 전문 격월간지 『동시마중』 등을 포함한 이 리스트를 통해 독자는 우리의 동시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하는 낯선 목소리를 기꺼이 환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음을 알게 된다.
제1부 ‘이음과 위반, 새로운 펼침’에서는 동시단을 역동적으로 갱신해 온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이중 나란히 놓인 두 편의 글 「마음을 앓고 동심을 일으켜 온몸으로―류선열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 이야기」와 「소나기 삼 형제 따라 무지개 미끄럼 타고―송진권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은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에서 “류선열이 방법적 궁리와 실험 끝에 만들어 낸 오리지낼리티는 송진권의 『새 그리는 방법』으로 일부 이전되고 계승된다”고 밝힌 바 있다. 독자는 하나의 반점마저 놓치지 않고 읽어 내는 저자의 섬세한 독해를 따라가며, 동시를 타고 흐르는 이전과 계승의 물줄기를 선명히 느끼게 된다. 더불어 “대형 괴물 신인” 송현섭,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지닌 신민규 등 반짝이는 신인들에 대한 저자의 순수한 감탄과 따뜻한 당부가 담긴 글 또한 놓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제2부 ‘당신을 기다리는 시의 자리’에서는 평범한 언어로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읽고 난 후에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게끔 만드는 놀라운 동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저자가 제1회 동시마중 작품상 수상자인 방주현의 「소망빌라 5층 꿈탑」을 읽어 내는 대목은 감동적이다. 5층의 석탑처럼 보이도록 시행이 배열된 이 동시에서 저자는 서민들의 꿈과 현실을 본다. 그러곤 제목으로 돌아와 ““소망빌라”는 말 그대로 “소망”을 “빌라”는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고 덧붙여 둔다. 이 순간, 저자가 한 편의 동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수차례 소리 내어 읽고 녹음하여 듣기를 반복했을 때 마주한 울림이 독자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이처럼 저자의 동시 이야기는 작품 설명에 그치지 않고 독자를 동시의 품속으로 바싹 끌어당긴다. 저자가 박해정의 동시를 두고 “눈으로 읽어도 재밌지만,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재밌”다고 말할 때, 독자 또한 그처럼 온몸으로 동시와 함께 놀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제3부 ‘불가능을 더듬어 가는 가능의 언어들’에서는 최근 우리의 동시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동시인들이 독자를 기다린다. 2000년 이후 출간된 동시집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김륭의 첫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를 두고 저자는 “출간 이후 십오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새로움을 간직한 채 다가온다”며 그 의미를 다시 헤아려 본다. 또한 ‘더 나아간 세계 읽기’를 통해 아직 한 권의 시집으로 채 묶이지 않은 최근작을 살피며 김륭 동시의 시즌 2를 상상한다. “안녕? 나는 이안이라고 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투명 인간 개미 씨―김개미 동시집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지금도 그게 고민이야” “이 책을 쓴 개미 씨는 그걸 참 잘해” 하고 말을 건네는 저자에게 어떻게 답장을 쓰고 싶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독자의 답장에는 저자와 함께 동시를 읽게 되어 누리는 기쁨이 가득 적힐 것이다.
저자는 함민복의 동시를 읽으며, “시는 쓰고 읽는 것이지만 사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시인이 시를 쓰며 시를 사는 것처럼, 독자 또한 시를 읽으며 시를 살고자 노력한다고. 동시를 향한 그의 사랑이 마르지 않는 이유가, 지극한 귀 기울임이 흐트러지지 않는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을 것 같다. 「책머리에」의 끝자락에서 동시를 표현하며 언급된 “불가능한 가능 건축”이라는 말, 이처럼 이 책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불가능’은 저자에게 닿을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닿고자 하는 기쁨일 것이다. 저자가 ‘불가능’이라고 말할 때 그 목소리에는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당도할 것임을 믿는 이의 환한 낙관이 담겨 있다. 오로지 사랑으로 쓴 동시 이야기 『천천히 오는 기쁨』을 통해, 독자들 또한 마침내 오고야 마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 추천사
어른으로서 동시를 쓰는 일은 언제나 국경을 넘는 일과 같다. 홀림의 상태와 꼼꼼한 자기검열의 극단을 오가며 홀로 지쳐 멈춰 있을 때는 꼭 이안 시인의 글을 읽는다. 그러면 곡기를 채우듯 든든해진다. 동시가 얼마나 좋은 건지, 아름다운 건지, 사랑스러운 건지 이렇게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동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축복이다. 예리하고 섬세한 눈길과 애정 어린 손길이 오래 가닿은 책, 어디를 펴서 읽든 에너지원을 얻을 수 있다._김준현(시인)
이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동시에 헌신하는지 안다. 『천천히 오는 기쁨』은 동시에 대한 그의 세밀하고 고유한 해석이다. 너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우아하게 번역해 준다. 이 순정한 절망과 열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동시를 쓰다가 길을 잃으면 이 책을 기억해야지._김개미(시인)
이안의 글은 꼼꼼하고 품이 넓다. 대상에 접속하는 일련의 과정은 흡사 수행자의 그것과 닮았다. 『천천히 오는 기쁨』 안에는 스물한 편의 ‘당신의 이름’을 곡진히 새겨 놓고 있다. 그의 다정다감한 언어는 잊고 있던 동시집마저 다시 펴게 만든다. 오늘의 우리 동시 지형도가 이 책 한 권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_유강희(시인)
『천천히 오는 기쁨』은 뭐랄까. 꾸덕꾸덕 마른 고욤을 매단 고욤나무 가지 같은 것이다. 한 알 한 알 따서 입 안에 넣어 보면 달다고만 할 수 없는 깊고도 아련한 맛을 느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가쟁이째 꺾어 온 이 열매들을 오래오래 맛보시라. 그가 초대한 이 잔치판에 기꺼이 와서 마음껏 즐기시길 바란다. 환영한다._송진권(시인)
시인은 자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앞구르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제 안에 마음을 알아내 삐뚤삐뚤 적으면서 말이죠. 그 애씀을 알아채 준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이안 시인은 그 마음을 일일이 다독이며 매트를 깔아 주고 착지를 돕느라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아요. 우리는 『천천히 오는 기쁨』을 꼭꼭 씹으며 다음으로 가기 위해 구르기를 연습합니다._임수현(시인)
이안은 동시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다. 동시를 쓰고, 평론을 하고, 동시 잡지를 만들고, 다양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독자들과 만난다. 1990년대 말 이후, 우리 동시가 흥성기에 진입하게 된 요인들을 짚어 볼 때, 그의 동시에 대한 헌신과 눈부신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천천히 오는 기쁨』에는 이안의 동시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깊이 있는 동시집 해설을 통하여, 그가 ‘천천히 오는 기쁨’으로 예감하는 우리 동시의 미래가, 낯설고 새로운 감각과 형태로 더욱 풍성해질 것임을 일러 주고 있다._송찬호(시인)
그는 또 내 등을 따뜻하게 두드리고 간다. 그가 주는 글은 다른 누구에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그런 말 같다. “안 오는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 곡진한 마음이 만져진다. 오늘도 그는 “꽃과 눈이 만날 때”를 기다리고, 나는 그의 기다림 속에 이미 도착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 그가 읽고 듣고 온몸으로 받아쓴 『천천히 오는 기쁨』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2000년대 우리 동시의 역사이기도 한 그의 곡진함에 밑줄을 긋는다._김륭(시인)
그는 늘 ‘내가 아는 걸 기준으로 미래의 동시를 틀린 것이라고 내치지는 않을까’ 경계하며 다른 시인의 목소리와 작품에 귀를 기울인다. 해설을 쓸 때마다 읽기에 그치지 않고 녹음하고 듣고 필사하며 애써 시인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쓴 그의 해설은 시인의 걸음보다 앞서지도 늦지도 않으며 독자의 걸음과도 잘 맞는다. 그러니 『천천히 오는 기쁨』이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한 것은 너무 당연한지 모른다. 나는 서둘러 그 기쁨을 마중 나간다._방주현(시인)
■ 책 속에서
나를 더욱 다그쳐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이 시대의 빛나는 시인들께 사랑과 존경을 바친다. 당신들 덕분에 동시라는, 불가능한 가능 건축의 꿈을 자꾸만 꾸게 된다. 안 오는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 천천히 오는 기쁨 같은 마음으로 당신의 말을 더 깊이 들을 줄 아는 귀를 갖고 싶다. (5쪽에서)
말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보다 항상 적다. 그러니 시에 관한 말하기는 말하지 않은 것을 놓친 기록일 수밖에 없다. 단순해서 쉬울 것 같지만, 단순해서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동시이기도 하다. (98쪽에서)
동시적(童詩的) 클리셰의 오솔길을 지나 우리가 보게 되는 건 비동시/반동시적 요소로서, 이제까지 우리 동시가 필터링하여 배제해 온 것들이 뿜어내는 현실적 생기와 광채, 공포와 불안이다. 때로 기괴스럽기까지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107쪽에서)
시의 소망은 영원한 불가능을 소망한다. 그것이 언제까지나, 어차피 잘 안 될 것을 알기에, 시인은 그 안 됨을 아끼고 사랑하며 지금도 내일도 뜨개질거리를 놓지 않는다. 취미를 넘어 삶의 전부가 될 때까지. (147쪽에서)
어떤 이유로든 해소되지 못한 유년의 시간, 장소, 사건,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접힌 채, 조금도 잊히지 않고, 펴지기를 열망하며 남아 있다. 어떤 동시는, 이 접히고 멍울진 ‘그 아이’의 자리에서 피어난다. 그것을 펴 볼 수 있다면,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면, ‘그 아이’는 아주 오랜 시간의 고독에서 풀려나 지금의 ‘나’와 온전히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173쪽에서)
쓰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얘기는 언제나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얘기. 감쪽같이 지웠어도 남은 기록엔 지운 자국이 간직돼 있다. 지운 자국이 쓴 자국의 다른 이름이라면 지우기는 쓰기가 되고 쓰기는 지우면서 나아가기가 된다. (196쪽에서)
무기교의 시는 기교가 없는 게 아니다. 기교를 뛰어넘었기에 다만 담백하게, 기교가 없는 듯 보일 뿐이다. 행과 연의 배치가 저마다 적실하고, 반점과 온점은 있을 곳에 있고 없을 곳에 없다. 구석구석 눈여겨보며 헤아려 배울 것이 많다. (218쪽에서)
시인은 자기가 말한 것에 해석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가 해석의 자유를 누리도록 말과 말의 간격을 조정하고 배치의 구도를 잡아 주는 사람에 가깝다. (307쪽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없어도 되는 것을 하나씩 덜어 낸 자리에 여백이 들어선다. 이 비어 있음이, 있음과 없음의 균형이, 이대로 서 있겠다고 마음먹은 말의 태도가 끝까지 시와 시인을 버티어 준다. 한 줄의 돌 하나에 또 한 줄의 돌 하나를 올려놓으며/내려놓으며 걸어가는 것이 시인의 시 쓰기라고 한다면, 그 마음을 같이 걸어 보는 것이 독자의 시 읽기라고 할 것이다. (303쪽에서)
깜깜한 밤, “따악 딱” 소리와 함께 하늘에 피어나는 푸른 불빛, 이것이야말로 신성이 사라진 세계에 처한 시인의 초상, 시의 빛이 아닐까. (328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