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에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행동하는 양심
오에 겐자부로가 작가 인생을 성찰하며 쓴 마지막 소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 이후 오에 겐자부로가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일본을 무대로 잡지에 연재한 이야기를 묶은 책. 당시 작가가 겪은 현실과 과거, 앞서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 발표해온 작품들 속 허구가 뒤섞이며 편지와 인터뷰, 대담 등 여러 형식으로 전개되는 자전적 소설이다. 집필 과정을 소상히 드러내는 한편, 여러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중첩시킨 메타소설이자 다성소설로, 오에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냈다.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파국적이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 세대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오에 겐자부로. 그가 남긴 마지막 소설 『만년양식집』은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로 하여 반발과 논쟁이 격화된 지금, 더욱 절실하고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대가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마지막 발자취
작가 인생을 치열하게 되짚어간 메타소설이자 다성소설
1957년 등단한 이래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온 한편, ‘전후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반전과 반핵을 역설해온 오에 겐자부로. “곤경에 처해 있는 현대 인류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형상화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현실 참여적 지식인으로서 왕성히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해나갔다. 특히 노년의 나이듦과 미학에 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등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2007), 필생의 숙원 프로젝트로 마침내 아버지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익사』(2009)에 이어,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혼돈을 그린 『만년양식집』(2013)은 오에의 만년 작업을 대표하는 소설 3부작이라 할 수 있다. 오에가 2023년 3월 3일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스스로 여러 차례 공언해온 바대로 『만년양식집』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2015년 3월 ‘연세-김대중 세계미래포럼’ 참석차 내한했을 당시, 오에는 『익사』 한국어판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인간 오에 겐자부로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으로 세 권을 꼽고 싶다.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그리고 『만년양식집』이다. 『만년양식집』에는 노인이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가’ 자문하는 내용을 담았다.”
오에가 대표적인 르포르타주인 두 작품과 함께 언급한 『만년양식집』은 원래 문예지 『군조群像』에 2012년 1월부터 2013년 8월까지 1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인생을 회고하며 소설 쓰는 과정을 노출하는 실험적인 메타소설로,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전모를 파악하게 해준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등장한 오에의 페르소나 ‘조코 코기토’를 중심 화자로 서술해나가며, 그의 소설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어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던 ‘세 여자’(여동생 아사, 아내 치카시, 딸 마키)의 비판과 반론도 담아낸다. 여성들의 냉철하고 준엄한 비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코기토는 자신이 발표해온 작품들이 빚어낸 오해에 맞서 해명하고, 잘못했거나 허술했다고 지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인정하며 성찰한다. 또한 코기토가 따랐던 스승 같은 존재였으나 비극적으로 죽고 만 기 형의 아들 기 주니어가 도중에 등장해 코기토와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로써 각기 다른 입장과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드는 다성소설의 면모가 더욱 심화된다. 코기토의 삶과 작품을 다각적으로 회고하며 여러 인물이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식으로, 일종의 푸가처럼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는 음악이 주요 모티프로 다뤄지기도 한다. 코기토의 고향인 시코쿠 산골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숲의 신비’ 전승에 기반해, 아들 아카리(오에의 맏아들로, 지적 장애를 지닌 작곡가 히카리가 모델이다)가 만든 〈숲의 신비의 음악〉이 줄곧 거론되며, 암으로 작고한 음악가 다카무라 도루가 언급되곤 한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만년양식집』에는 오에의 주요 작품들이 다수 거론된다. 장애를 지닌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쓴 「하늘의 괴물 아구이」와 『개인적인 체험』,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에 대표작으로 언급된 『만엔 원년의 풋볼』, 기 형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그리운 시간에 보내는 편지』, 고교 때부터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인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의 자살을 계기로 집필한 『체인질링』, 두 노인의 모의 테러 사건을 그린 『책이여, 안녕!』 등인데, 작가로서 거둔 성과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자기 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작가 인생을 되돌아보고 총결산하려는 오에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만큼 『만년양식집』은 오에의 작품을 읽어온 이들에게는 그간 쌓아온 의문을 풀며 작가의 의도를 새삼 깨닫게 해줄 것이고, 오에를 처음 접한 이들에게는 이 소설에 나온 주요 작품들을 통해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앞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삶 속에서
파국을 뛰어넘어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
소설 속에서 노년의 작가 ‘나’(조코 코기토)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서고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노트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노트에 백혈병으로 타계한 친구인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W. 사이드의 『만년의 양식에 대해서On Late Style』에 착안해 ‘만년의 양식으로 살면서In Late Style’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만년양식집’이라는 제목을 단다. 한편 아사(여동생), 치카시(아내), 마키(딸)는 ‘세 여자’라는 그룹을 결성해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에 대한 반론과 각자 품어온 생각을 써서 보내온다. 나는 내 글과 ‘세 여자’의 글을 합쳐서 일종의 사가판私家版 잡지 『‘만년양식집’+알파』를 만들기로 한다.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나와 관계가 서먹서먹해졌지만, 지적 장애를 지닌 아들 아카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오염된 현황을 취재한 TV 특집 방송을 보고 충격받아 소리 내어 운 나를 걱정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진 속에서 동요하던 아카리 자신도 간질 발작을 일으키며 고통을 겪게 된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지자 마키는 “아빠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서 오빠 아카리와 함께 도쿄 집을 떠나 코기토의 고향인 시코쿠 숲속의 집으로 이주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한편 『그리운 시간에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기 형’의 아들로, 미국에 살던 기 주니어가 일본에 온다. 그는 후쿠시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대지진과 원전 사고라는 ‘파국’을 취재하는 다큐 작업도 진행한다. 그 일환으로, ‘파국 위원회’라는 단체를 결성해 아버지 기 형, 자살한 영화감독 하나와 고로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는 그 증언자인 나와 아사, 치카시와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류머티즘이 재발해 힘들어하던 치카시를 간병하기 위해 마키가 상경하고, 그 대신 내가 시코쿠로 가서 아카리와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갈등을 차츰 해소해나가던 나와 아카리는 아카리가 작곡하고 마키가 선곡한 CD 〈숲의 신비의 음악〉을 숲속에서 함께 들으며 감동을 느끼고, 내가 일흔 살에 쓴 시를 바탕으로 한 곡을 아카리가 만드는 계획으로 옮겨간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를 살아가며 ‘노년의 곤경’을 겪는 작가의 일상과 과거 회상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만년양식집』에서는 조코 코기토와 주변 인물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옛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기 주니어의 인터뷰에 응하면서부터 코기토는 일찍이 작가로 활동하며 실제로 겪은 일에 기반해 써온 작품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 “앞서간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 인생의 마지막 정리를 했는지” 깨달아가던 그는, 차츰 절망과 우울에서 빠져나와 세상과 제대로 마주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며 희망을 꿈꾸게 된 것이다. 장애를 지녀서 마흔 후반의 나이에도 자립하지 못한 아들 아카리는 아버지 코기토를 더욱 불안하게 하지만, 코기토에게 중요한 테마인 ‘숲의 신비’ 전승에 영감받아 만든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치유와 화해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세 여자’도 코기토를 그저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코기토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며 포용하고 연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마지막에 코기토가 첫 손자의 탄생을 계기로 쓴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특히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는 시 속 구절은 본인이 죽은 후에도 삶을 이어갈 다음 세대에 거는 긍정적인 기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파국에 맞서려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를 다시금 보여준 오에 겐자부로는 『만년양식집』 출간 당시에 소회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아마도 마지막 소설이 될 『만년양식집』을 나는 원숙한 노작가로서가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빚어낸 파국에 내몰리는 심정으로 써나갔다. 그러나 일흔 살 때 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를 새롭게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했다는 것도, 죽은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
추천의 말
오에 겐자부로 소설의 핵심은 그가 말했듯이 ‘다시 쓰기’에 있다. 자신의 소설과 인생 모두를 총체적으로 돌아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다시 쓰기의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은 폭력과 억압에 대해, 핵 공포의 시대에 대해, 그리고 대재난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세계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은 놀라운 갱신을 거듭해왔다. 그 장구한 작업이 마침내 『만년양식집』이라는 형태로 최후의 다시 쓰기에 도달했다. 이 마지막 순간을 나는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뛰어난 작품을 쓰는 데서 그치지 않으며, 결국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전 작품을 포함한 작가 자신의 과거를 계승하고 또 배반하며 한 작가로서 완성되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으며 배웠다. 작가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주제가 새롭게 갱신되고, 그것을 통해 그의 지난 작업 전체가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는 이 경이로운 작업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아니라면 만나기 쉽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_황인찬(시인)
작품 전체에 감도는 이상한 박력은, 자신의 생애를 걸고 원전 사고나 그 후 일본의 상황에 대해 묻고 있는 데 있을 것이다. _시게사토 데츠야(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
고통스러운 가시투성이인 이 소설은 그저 깊이 감동할 수밖에 없는, 마음에 스며드는 매력을 담고 있다. _노자키 칸(프랑스문학자)
오에만큼 절실하게 ‘3·11’에 대치한 문학인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 _오사와 노부아키(문예평론가)
재앙과 고뇌의 그림자에 뒤덮인 와중에도 생명을 이어갈 인류의 희망이 느껴진다. _요시무라 치아키(아사히신문 기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빌려 표현되곤 하는 오에의 국가 비판은 남성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 비판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폭력이 자행되기 이전의 원초적 공간을 향한 지향성이 그 너머에 엿보인다. 오에의 소설들은 개인의 내면에 집착했던 근대소설을 넘어서려 하는 메타픽션이자 공동체 회복을 지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_박유하(옮긴이)
본문에서
집주인이 어두운 목소리로 이제 막 태어난 새끼 말을 저 들판에서 뛰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방사능비로 오염되었으니까요, 라고 말했을 때, 끊임없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 방사성물질로 인해 오염된 땅을 (최소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실제로는 그런 느긋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표정이, 불충분한 조명 아래 드러난 집주인의 상반신과 카메라를 받친 PD의 어깨를 바라보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로 묶을 수 있다면, 그런 일을 우리가, 동시대의 인간들이 해버렸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복구할 수 없다……이런 생각에 충격을 받고 나는 노인의 울음소리를 냈던 것이다. (18쪽)
이제 우리의 ‘미래의 문’은 닫혔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은(특히 나의 지식 같은 건 별것 아니었지만 아무튼) 전부 죽고 만 것이다…… (21쪽)
“그리운 시간으로부터 답장은 왔나요?/ 답장은 왔나요?/ 왔나요? 왔나요?/ 그리운 시간으로부터 답장은 왔나요?”
갑자기 가슴속에, 그때까지 소녀들의 노랫소리를 부드럽게 따라 움직이던 기억을 뒤엎는 듯한, 일흔을 넘은 늙은 여자의(그러니까 나의) 분노에 떠는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그리운 시간으로부터 답장은 안 와!”
그 짜증은 바로 오빠를 향한 것이었다. (…) 죽은(살해당한?) 기 오빠를 이거 잘됐다는 듯 ‘그리운 시간의 섬’으로 보내버린 이후 오빠는 최소한 자기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진심을 담은 진실한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상 ‘그리운 시간의 섬’에서 답장이 오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33쪽)
아빠는 아카리 오빠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건 아빠가 자기 자신과도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아구이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의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아빠 자신이 소설에 썼으면서도 아카리 오빠를 향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거니까.
아빠는 아카리 오빠가 태어났을 때도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방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닐까요. (77쪽)
당신은 나라의 미래가 닫힌다 해도 자신은 나이가 들어 얼마 못 살 테니, 책의 지식만은 어떻게든 지닌 채로 죽자, 라고 말할 사람 아닌가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나는 아사한테 그렇게 말해봤어요. 그런데 마키가 곧바로 답변을 했는데 아사도 나도 그렇겠다고, 네 말이 맞겠다고 맞장구를 치게 되었죠. 마키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아빠 머릿속에 아카리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80쪽)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사건은 아카리 오빠가 작곡한 피아노곡 카세트가 도착해 재생해봤더니 귓가에 남아 있던 ‘숲의 신비’의 음악이었던 일이다, 라고도 말씀하셨죠……
그래서 저는 아카리 오빠와 둘이 시코쿠 숲에 살게 되면 우선 ‘숲의 신비’ 음악이 아카리 오빠의 몸에 전해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어요. 그것이 다시 한번 아카리 오빠의 음악으로 표현되지 않을까요? 음악은 언어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아카리 오빠 내면의 언어니까, 그 음악을 작곡하고 릿짱이 연주하게 되는 시간이 우리에게 온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88쪽)
나는 어떤 후회의 감정과 함께 깨달았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들에게 죽음이라는 숙제를 계속 내밀어왔던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그런데 이날 아들은 우리가 반복해온 뻔한 말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응답을 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죽을 거니까요! 저는 곧 죽을 거니까 괜찮습니다!’ (104쪽)
아빠는 자신의 가정을 기반으로 해서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까지 소설로 써왔지요.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보니 가끔 그 방식 자체를 변명하고 싶어지는 것으로 보여요. 예컨대 소설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라는 식, 즉 소설이라는 형식에 책임을 지우는 식으로 (…) 분명 소설가에게는 소설론적으로 살고 죽을 자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아카리 오빠와 저는 지금 각자에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을 실감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희는 원칙적으로 아빠가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을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124~125쪽)
“저는 자신만은 파국을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 파국을 받아들일 각오중인 선생님의 작품과, 기 형과 하나와 고로 씨가 실제로 살고 죽은 파국을 검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스스로가 자신이 앞으로 향하게 될 파국을 아마 보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파국 위원회’에 대한 보고가 성립되겠지요.” (136~137쪽)
오빠, 지금은 우리 후기고령자야말로 우리 나름대로 기민한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이상 시간이 없고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기 오빠를 필두로 죽은 사람들이야말로 더 서둘렀을 것이고 (죽은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다고 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태세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96~197쪽)
기 주니어는 화를 냈다. 게다가 아카리도 비슷한 말을 이어갔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녹아내린 연료가 땅속에서 어떤 상태인지는 고사하고 그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고, 오염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카타 원전은 재가동할 것 같고, 내셔널리즘은 아시아를 총체적으로 좀먹고 있어 헌법 수호도 위험하지요. 조코 선생님이 젊다 한들 어떻게 될 일이 아닙니다……”
“아빠는 곧 여든 살입니다. 저는 쉰 살이고 자립하지 못합니다. 마키는 우울증입니다.” (312쪽)
상처투성이인 나를 벌거벗기고,/ 당신이 따온 약초/ 기름을 발라주면서/ 어머니는 탄식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되나?/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긴 동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공유하며 싸웠고/ 백혈병과도 싸웠던 친구가/ 만년에 연구 주제로 삼은 건/ 어떤 유의 예술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선택하는/ 표현과 삶의 방식의 스타일./ 그들은 평화로운 원숙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전통을 거부하고 사회와의 조화를 거부하고/ 부정성의 한가운데에/ 홀로 꼿꼿이 선다. 그리고,/ 일찍이 없었던 독창성에 도달하는 이들이 있다…… (337~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