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명쾌하다.” _조연정(문학평론가)
사랑을 수행하는 툴(tool)로서의 비평
미혹으로부터 미지의 문학을 창발해내는 인아영 첫 평론집
문학평론가 인아영의 첫 책 『진창과 별』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활동을 시작한 그의 데뷔 5년 만의 첫 평론집이다. 비평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응답을 거짓 없이 수행하는 일”(당선 소감)이라는, 비평에 대한 근사한 정의이자 출사표를 건네며 등장해 독창적이고도 진솔한 글로 단연 주목받는 비평가로 자리매김한 인아영. 2020년을 전후해 새롭게 재편되고 또 쓰이는 중인 한국문학 장(場)과 사(史)를 살피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어느 페이지의 시작 또는 끝에서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장’과 ‘사’를 모두 일컫는 까닭은 현장비평의 최전선에서 기민하게 현재와 접속하는 성실함과, 유장한 문학의 시간과 계보와 맞붙어 우리 시대의 비평으로 축성하는 대담함을 두루 갖춘 비평가가 몹시도 귀하기 때문일 터.
“급진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명쾌”(조연정)한 그의 비평은 ‘빈틈없는 분방함’을 선보이며 평문이 가진 지적 쾌감을 안겨줄 뿐 아니라, 문득 진심을 부려놓는 결구의 문장들로 하여금 무장해제의 기쁨을 선물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천진함과 능숙함이 한데 어우러진, 때로는 가장하기도 하는 그의 글들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은 이 명쾌(明快)가 ‘진창’에서 비롯한 각려의 흔적임을 모르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이번 책의 제목 ‘진창과 별’은 반짝이는 한 젊은 평론가를 형상화한 상징이자, 그가 마음 깊이 새겨둔 문학론을 지시하는 요체로 읽히기도 한다. “진창이자 별이고 별이자 진창인 이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약한 수행”을 계속하기. 어쩌면 시작의 약속을 여일하게 품어온 한 평론가가 지난 5년간 써내려간 문학적 ‘수행록’의 다른 이름이 바로 『진창과 별』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에는 정답도 정량도 규칙도 논리도 없어서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반대다. 문학이 알려주는 것은 차라리 이런 것이다. 모든 개인은 각자 처한 수많은 조건들에 촘촘히 얽혀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명쾌하고 예상 가능한 공식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이상하고 불확실한 함수에 매여 있다. 우리는 깨끗하고 투명한 진공이 아니라 구질구질하고 누추한 진창에 속해 있다. 우리는 모두 진창에 있다. (…) 문학은 우리가 모두 진창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인식(철학)에 그치지 않는다. 저멀리 떠 있는 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정치)로 반드시 이어지지도 않는다. 다만 문학은 진창과 별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나를 만든 세계의 조건과 내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구질구질하고 누추한 진창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게 한다. _「책머리에」에서
“하찮고 아름다운 우리가 있다. 없지 않고 있다. 여기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동시에 아름답게 하는 문학-삶
『진창과 별』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사랑의 형식’에는 백은선론, 김멜라론을 필두로 지난 5년간 폭발하듯 흘러나온 이채로운 사랑의 언어와 서사들을 탐문해보는 글을 담았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이 아닌, 동시대 작가와 저자 저 자신이 몸소 느끼고 겪어온 바로 그 사랑이 표현된 텍스트들을 발굴하고 이해하고 독해하는 데 할애했다. 더불어 젠더화된 고통, 돌봄의 권력관계 및 조건을 심문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차별과 혐오의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며 사랑이라는 낭만적 관념/모델에 대해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2부 ‘다가오는 것들’에는 ‘비평의 역사’에 관한 글을 모았다.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비평사를 젠더링, 퀴어링해 다시 읽어내는 일련의 메타비평은 평론가 인아영의 인장이자 특장을 만끽할 수 있는 자리다. 기존 담론이 구축해놓은 해석의 틀을 의심하고, 틀어-보고, 재배치하는 이 근거 있는 도발은 비평의 조건을 질문/점검하고 새로운 역사 쓰기로서의 비평으로 도약한다. 특히 “한국문학장에 흘러가는 시차(時差)는 좁힐 수 없는 시차(parallax)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전의 문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결기 어린 진단은 “현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문학과 문학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정립하는”(「시차(時差)와 시차(parallax)」)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자 약속으로도 다가오기에 더욱 미덥다.
그렇다면 사십여 년 전에 제출된 김현의 명제는 오늘날의 현실에 맞추어 다시 쓰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문학은 억압한다.
문학이 언제나 억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써 긴장하여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 비판하며 살펴보지 않으면, 문학은 언제라도 인간을 억압할 수 있다.
(…)
문학이 억압을 반성하게 해준다는 김현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학이 그러한 반성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은 문학이 유용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문학은 인간을 억압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자신의 억압까지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_「문학은 억압한다」(130, 134쪽)
3부 ‘없지 않고 있다’에는 ‘수행의 조건’에 관한 글들을 배치했다. 황정은, 박민정, 최은미의 텍스트에 바싹 다가가 퀴어 페미니즘의 렌즈로 읽어낸 이 작품론들은, 단지 여성 혹은 퀴어인 인물을 조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국적,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조건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수행성에 주목한다. 작금의 한국문학장의 활기는 그저 작품과 비평의 양적 다양화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충분히 정교한 독해와 형식의 재사유, 새로이 창안/창발되는 문학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4부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는 ‘인간의 경계’에 관한 글을 묶었다. 김초엽, 구병모, 조예은의 작품을 경유해 비인간 담론 및 SF, 스릴러, 게임이 한국문학과 조우하는 순간을 들여다보며, 이로부터 발생하고 또 갱신되는 관계성, 정치성, 가능성을 살핀다. “경계란 어떤 덩어리를 날카롭게 구획하는 가는 선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넓게 펼쳐지는 거대한 세계”(7쪽)라는 근사한 통찰을 다양한 서사 양식과 ‘멋부리지 않지만 끝내 멋진’ 문장을 통해 증명해낸다.
역사 바깥에, 혹은 역사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행위자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반복되는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그러한 상황에 저마다의 믿음과 실천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 대응에는 예정된 절대적 원칙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행위자들은 각자의 주체성과 우발성을 가지고 경합하거나 화합한다. 그 과정은 통일적이거나 조화롭지만은 않고 때로 불완전하거나 미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견고한 구조 속에서도 불완전하고 미약한 수행을 반복한다. 의미는 거기에서 만들어진다. 매일의 반복으로부터, 지금의 수행으로부터. _「다가오는 것들」(214쪽)
끝으로 이 책을 마무르는 에필로그이자 1부의 첫 글로 순환하듯 이어지는 ‘코다’를 배치했다. 「부서진 조각들」은 한 작가의 순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에세이이자 짧고도 강렬한 문학론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진창과 별』에 실린 글이 결국 삶이라는 형식과 이어져 있기를, 우리를 아프게 하는 동시에 아름답게 하는 삶과 문학에 대해 부디 사유하기를 멈추지 말자는 지극한 제안을 건넨다.
우리는 그저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이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통과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많이 말해야 하니까, 아무리 말해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다시 한번 더. 우리는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_「우리는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움을」(340쪽)
■ 작가의 말
어떤 텍스트는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텍스트가 그랬고, 그 느낌이 비평을 쓰게 했으며, 쓰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처음으로 비평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무렵 일기장에 자주 적은 문장이 있다. 좋은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고 싶다. 이보다 내가 문학비평을 하는 이유를 알맞게 설명하는 문장은 없다. 텍스트에 숨어 있는 미덕(좋은 것)을 발견하는 눈, 그 미덕이 주는 체험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마음(좋아하는 것), 그 마음을 나의 언어로 전환하는 행위(사랑하는 것). 미덕의 발견, 체험의 인정, 언어의 전환이라는 세 가지 연속적인 과정이 나에게는 사랑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나의 사랑을 수행하는 툴이다.
2023년 겨울
인아영
■ 추천의 말
눈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히는 글일수록 그 글이 쓰인 시간의 깊이는 좀처럼 가늠하기가 힘들어진다. 인아영의 글들이 내게는 그랬다. “문학은 억압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견고한 구조 속에서도 불완전하고 미약한 수행을 반복한다”. 동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성실하고도 기발한 분석과 날카롭고도 집요한 성찰은 저 두 문장을 확인하기 위해 쓰인다. 그녀의 비평은 급진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명쾌하다. 사유의 쾌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은 멋부리지 않지만 끝내 멋지다. 인아영의 비평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현장은 한층 더 뜨거워졌다. 함부로 위기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글을 읽고 ‘안 되겠다’는 마음에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비평도 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책을 읽자마자 나에게 떠오른 문장도 바로 그것이다. 안 되겠다. 멈추지 말고 읽고 쓰자. 멋진 동료의 글이 그저 고맙고 반갑다. 우리는 왜 ‘미약한 수행’을 멈출 수 없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 ‘진창’이자 ‘별’이 된 우리는 그 ‘아프고 아름다운’ 길을 오래 함께 갈 것이다. _조연정(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고통에 대한 기대는 여성 예술가에게 한결 내밀하고 노골적인 환상으로 작동한다. (…) 신비화된 여성 시인에게 비추어지는 조명이란 그의 작품 자체보다 매력적 외모나 비극적 생애를 향해 있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때의 비극적 생애란 본디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나 남성의 잔인한 폭력이나 무심한 부정으로 인해 겪는 불행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예술성을 가늠하는 무형의 척도로 여겨지는 고통은 젠더화되어 있다. _「괴로움의 기술」(16쪽)
어쩌면 우리는 문학이 왜소해지고 있다며 슬퍼하면서도 정작 문학의 쓸모는 애써 무시해온 것이 아닌가? 문학은 무해하다는 믿음 혹은 문학은 특별하다는 자기만족을 지키기 위해 문학의 유용성을 외면해온 것이 아닌가? 정치적인 힘도 없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처리하기 위해 ‘쓸모없을수록 오히려 쓸모 있다’는 모순어법으로 자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는 동안 문학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사람일수록 문학의 쓸모를 어떤 형태로든 누려왔던 것은 아닌가? _「문학은 억압한다」(131쪽)
이는 지금 한국문학의 거대한 흐름인 페미니즘 서사와 퀴어 서사가 ‘그들’만의 게토화된 이야기가 아님을, 오히려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가장 깊이 연루되어 있는 이야기임을,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와 남성의 이야기는 언제나 한덩어리로 엉겨 있음을 말해준다. 누군가의 무지는 누군가의 앎으로, 누군가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누군가의 균형은 누군가의 깊이로 지탱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젠더 지형을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는 이 집요한 시선의 힘으로부터, 역사는 다시 쓰이고 있다. _「눈물, 진정성, 윤리」(157쪽)
만약 이 시대에 여전히 문학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맞게 문학성을 갱신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문학성이 그동안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구성되고 변천해왔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2010년대를 통과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지금까지 형성되어온 문학성을 반대 방향으로 구부리는 벤딩, 혹은 본래 문학적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가치를 절반으로 자르는 분할이 아니라, 오늘날 현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문학과 문학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우리에게 맞는 문학과 비평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_「시차(時差)와 시차(parallax)」(179~180쪽)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란 그 작품이 속해 있는 당대 사회의 가망과 한계를 동시에 건드리는, 그래서 그 사회에서 이미 굳어진 익숙한 가치판단과 해석의 방식을 물음에 부치는, 결국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왔던 문학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는지 점검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 질문으로서의 소설을, 우리는 문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_「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193쪽)
비평사가 과거에 구축된 특정 집단의 누적된 이해관계에 따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계 맺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조건을 가진 개별 행위자들의 수행과 새롭게 창발하는 문학 텍스트로 인해 끊임없이 역동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배치의 통치성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예측불가능하고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면서 역사 쓰기의 열려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나가는 일일 것이다. _「다가오는 것들」(203쪽)
진창과 별은 한없이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그렇다면 우리는 진창에 빠진 채로 저멀리 떠 있는 별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진창이자 별이고 별이자 진창인 이곳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_「진창과 별」(218쪽)
부족하고 남루하고 고단한 세계에서 단 하나라도 신성한 것을 가져볼 수 있으니까.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하찮은 사람과 더불어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되고 무언가를 아름다움으로 여길 수 있으니까.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니까.
볼 수 있으므로 보인다. 보이므로 있다.
있다. 하찮고 아름다운 우리가 있다. 없지 않고 있다. 여기 있다. _「여기 있다」(234~235쪽)
창작자들이 소설로서 피해자 여성을 재현해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작품을 독해하고 비평하는 과정에서 이 여성 인물들이 ‘피해자다움’에 균열을 내는 장면을 더 포착해내는 일이다. _「그런 피해자는 없다」(275쪽)
이런저런 수치와 굴욕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까짓거 안 쓸 이유까지는 못 된다면,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계속 무언가를 쓰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이미 무수한 조각으로 깨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런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도 깨끗하거나 매끄럽지 않은 채로,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며 어긋난 채로, 누더기 같은 잘못과 집착과 우스움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삶이란 완전무결한 꽃병의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말끔하게 이어붙이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에 부서져 있는 수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그 조합만큼의 가능성을 살아보는 과정이며,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글을 쓰고 또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_「부서진 조각들」(443~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