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의 안쪽에서 벌이는 고향지키기의 소설화
고향을 고향답게 가꾸고 지키는 것을 소설의 근간으로 삼아온 작가 이지흔의 두 번째 소설집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이 출간되었다. 2편의 중편과 6편의 단편소설은 고향을 고향답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것과 분연히 싸우는 작가의 외로운 고향지키기를 보여준다. 그것은 환경문제, 농촌경제의 파탄, 개인주의적 성향의 만연, 또는 황금만능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한 소재와 방법으로 한국인의 원형질적 고향의식에 대한 사수의 결의를 다짐한다.
산업화의 부산물인 약자들의 삶 조명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은 지난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빛깔 위에 세워져 있다. 주인공들은 도시를 무대로 잃어버린 시공간을 그리워하며 나날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도시에 없다. 마음이 닻을 내리고 있는 곳은 지금 이곳에 없는, 그들이 떠나온 먼 곳-고향, 혹은 지난 시절이다. 그곳은 이미 주인공들의 마음속에서 찬란한 빛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도시생활에 섞이지 못하고 부유한다. 그러면서 이유도 없이 아파하거나 도시인의 질시의 대상이 된다. 현재의 생활터전에 마음이 없음으로하여 몸마저 시르시름 병들어간다.
작가는, 산업화 시대가 낳은 배설물 앞에 까닭없이 배설의 충동에 시달리는 한 사내의 고동(「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과 이웃간의 풋풋한 인정의 교류가 차단된 아파트 생활에서 도욱으로 의심받는 촌사람 뚱땡이 아줌마의 비애(「곁에 있던 바람」), 친구간의 의리도 현실상황이나 물욕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마는 현 세태에 대한 풍자(「그 찬한하던 빛」), 그리고 부권의 약화로 한 남성이 겪는 무기력증(「하나를 위한 변명」) 등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남루한 생활과 따뜻함에 대한 그리움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챙겨간다. 그 소설들은 한결같이 무기력하거나, 소외되고, 때묻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삶의 아웃사이더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자들의 슬픔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산업화로 인해 농촌공동체가 새롭게 재편되는 삶의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발생한 불화의 산물이다.
배설의 충동과 도시적 삶과의 불화
표제작인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설의 충동에 시달리는 한 사내를 통해 사회가 산업화됨에 따라 생기는 갖가지 폐단을 배설이라는 소재로 재미있게 보여준다.
주인공인 나는 건넛방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멀쩡한 냉장고를 버리는 것을 본 이후 참을 수 없는 배설의 충동에 시달린다. 그것은 20여 년 전의 체험과 맞물리면서 잠복해 있던 증상이 냉장고 사건을 계기로 표면화된 것이다. 나는 누렁이의 배설물을 보거나 골목길을 청소할 때, 청소차를 향해 뛰어나가는 여자들을 볼 때, 거리에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면 벌금을 물린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도 심한 배설의 충동을 느낀다. 의사의 진단은 과민성 대장염이라고 하나 이 증상은 약을 먹어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명의 산물이나 도시적인 것과의 불화는 여권(女權)의 강세 앞에서 상대적으로 무력감에 빠진 한 남성의 기이한 행적(「하나를 위한 변명」) 속에서도, 도시공동체 사회에서 인간미를 갖춘 한 이웃이, 바로 그 인간미 때문에 이웃에게서 배척을 받는 쓸쓸한 현실(「곁에 있던 바람」) 속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아가는 말구루마몰이꾼 사내의 불우한 삶(「숨쉬는 화살표」)속에서도 그대로 변두되어 나타난다.
생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 약자들의 고난은 이지흔 소설의 주조색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환경문제라든지 대 사회적인 발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환경문제, 역사의식, 눌린자의 고통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중편 「물」과 단편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속에서 읽혀진다. 중편 「물」은 골프장 공사와 마구잡이식 지하수 개발에 따른 식수원의 고갈로 인한 농토의 황폐화를 추적하면서, 피폐해진 농촌마을과 환경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그리고 있다.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 역시 도시생활의 과소비와 그로 인한 쓰레기 공해의 문제를 배설이라는 특이한 소재로 보여준다.
이러한 공해나 쓰레기로부터 삶의 터전, 혹은 고향지키기의 소설화는 중편 「사촌의 가방」에 오면 역사의식이 수용되면서 한층 심화된다.
이 소설은 중구에서 생면부지의 사촌형이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오면서 벌어진다. 그가 들고 온 가방 속에는 인민위원장을 지낸 백부의 유골이 들어 있다. 백부의 좌익활동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온갖 수난을 당한 바 있었다. 할아버지의 묘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들 일행이 묘터를 확인하는 순간 묘를 15년 동안이나 관리해온 사람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는 고아 출신의 우인섭이란 자로, 알고 보니 바로 백부로부터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인섭은 화해를 요청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난날의 비극이 아니라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백부와 우인섭의 끈질긴 뿌리찾기, 고향찾기를 병치시키면서, 그 고향찾기 의식을 통해서 비극적인 현대사의 갈 등을 해소시켜 화해로운 삶의 접합처 모색한다.
그리고 억눌린 자들이 겪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그린 「서글픈 돼지코」는 시골의 한 국민학교에 그 학교 출신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걸리게 되면서 겪는 사건을 통해 한 사람의 명예욕으로 인해 다수의 힘없는 자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를 은유적으로보여준다.
고향을 지키는 듬직한 수문장과도 같은 소설가
이런 다양한 표정을 지닌 그의 소설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이지흔의 소설은 부당한 권력과 잘못 풀린 역사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몇 겹으로 고통받는 약자들의 이야기"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은 폭력적 방법으로 보복을 다짐하거나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보통상식을 가진 보통사람이다. 이지흔은 그 보통사람이 마음의 고향과 지리적 고향을 함게 지키면서 상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의 방법은 무저항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비폭력주의는 공동체의 화해로운 삶을 위한 기본 조건이기에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해설 「고향지키기의 소설화」)라고 밝히고 있다.
고향을 고향답게 가꾸고 지키는 것, 그것은 이지흔 소설쓰기의 근간이다. 이때 고향은 지리적 공간이면서 한편으로 마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지흔은 이 두 고향을 함게 지키는 듬직한 수문장과도 같은 소설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