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자체가 우리 시대의 한 정신이자 거대한 상징인 시인 김남주 그의 ‘무기’ 안에는 ‘악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름 자체가 우리 시대의 거대한 상징이자 하나의 정신으로 우뚝 서 있는 시인 김남주. 그가 48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다섯 해가 되었다. 시인의 5주기(2월 13일)에 맞추어 문학동네에서는 그의 시들 중에서 그간 ‘투사’의 이미지에 가려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서정시의 정수만을 모아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제하의 서정시집을 펴낸다.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암울한 시기였던 7, 80년대에 민중운동의 기수로서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서서 누구보다 가열차게 저항과 투쟁의 시를 썼던 시인 중의 시인, 남민전 사건으로 9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내 전사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투사 중의 투사 김남주 시인. 우리는 그를 ‘전사’와 ‘시인’이라는 두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전사의 갑옷 속에 가려진 김남주의 ‘서정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은 그 동안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군부독재의 폭압과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실로 적절한 대비와 역설을 통해 촌철살인의 풍자 속에 담아내었던 그의 시의 또다른 한켠에는 미모사의 가녀린 떨림 같은 존재의 여림이 있었다. 생활과 이념이 상호교접하며 토속적인 민중성을 통해 빛나는 시적 리얼리즘의 완성을 이루어내었던 김남주 시인이었지만 그와 더불어 투박한 표현 속에 진솔한 고백을 담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세계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故 김남주 시인의 5주기를 맞아 그의 서정시들만을 새로이 엮어내는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뜨거운 심장 깊숙이에서 솟구친 구체적인 생활의 냄새와 숨결, 삶 자체가 시로 육화(肉化)되어 내뿜는 시적 치열성, 한없이 맑은 영혼이 진실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순결성, 그리고 ‘한 시대의 나팔수’로서 그가 품고 있었던 시의 ‘악기’들을 다시금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시대가 달라져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김남주 시의 진정성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하이네’로 불리는 김남주 서정시의 따스한 숨결
김남주 서정시집 『옛 마을을 지나며』는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55편의 시를 수록했다.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연보와 황석영 선생의 발문을 덧붙였다.
1부 14편은 서정적인 시들로 구성했고, 2부는 전사의 길을 걷던 시기부터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출옥 이후의 역정 등 시인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보는 28편의 시를 실었으며, 3부 13편은 풍자시 중심으로 엮었다. 이 시들은 김남주 시인의 네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풀빛, 1989), 다섯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여섯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한길사, 1992), 옥중 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2(창작과비평사, 1992),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비평사, 1995) 등에서 가려 뽑았다.
김남주 서정시집 『옛 마을을 지나며』를 휘감아도는 전체적인 인상은 시라는 장르가 담을 수 있는 ‘따뜻한 서정’의 원숙한 형상화이다. 투쟁의 현장에서 격렬하게 잉태된 시이거나 힘없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읊은 시이거나 그러한 시의 배경에는 인간적인 고독과 고뇌를 서정적인 시어로 형상화한 김남주 특유의 따듯한 숨결이 진하게 배어 있다.
「창살에 햇살이」에서는 감옥의 창살에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와 주고받던 “옛추억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개똥벌레 하나」에서는 “개똥벌레야 나는 네가 이슬로 환생했다고/노래하는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빛나는 감성을 노래한다. 안치환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진 「물 따라 나도 가면서」는 자연의 순리대로 삶을 정화하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전통적인 운율에 맞춰 잔잔히 읊음으로써 김남주 시인의 가슴에 담겨진 따스한 감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처럼 김남주 시인의 일련의 서정시들은 황석영 선생이 지적했듯이 시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씌어져 동시처럼 맑기만 하다. 그가 ‘한국의 하이네’로 불리어지는 이유, 그리고 그의 시에서 소월과 영랑과 이용악의 체취를 맡게 되는 까닭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황석영 선생은 김남주 시인을 추억하는 발문에서 “시인과 시는 시대정신의 꽃”이라고 전제하면서 김남주 시인을 “남도의 동백꽃”에 견주고 있다. 동백은 질 때도 이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으며 깨끗하게 목이 딱 꺾여 온전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마 쓸어내지 못하고 한 송이 한 송이를 고이 줍는다고. 황석영 선생의 말처럼 이 시집은 김남주 시인의 전사로서의 올곧음과 더불어 그의 시에 육화되어 있던 따뜻한 서정의 시들을 한 편 한 편 곱게 그러모아 엮은 것이다.
이번 서정시집 『옛 마을을 지나며』 출간을 계기로 김남주 시에 대한 다각적인 재조명 움직임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김남주 시인의 5주기에 맞춰 추모 행사도 활발히 준비되고 있다. 생가 방문 등 김남주 문학 기행 행사가 오는 20, 21일 이틀간 열리고, 5월엔 광주 망월동 그의 묘지 곁에 시비를 세울 예정이며, 시비 건립을 위한 모금 행사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