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한 곡의 러브송에서 시작되었다. 스물두 살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노래에서. 그때 난 생각했다. 모든 러브송 뒤에 한 사람의 아티스트가 있는 거라면 어떨까? 그리고 그 아티스트가 후세에 길이 남을 근사한 재능을 가진 이라면? 그리고 나는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분명 그는 고통받는 예술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자기표현은 무엇보다도 희생적 결핍과 절망 그리고 감정적 학대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조이 고블
불행한 예술가만큼 매혹적인 존재가 있을까? 자신의 시대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요절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예술가, 가난하고 병든 예술가는 언제나 덧칠된 후광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생애를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예술 애호가들이 예술을 감상하는 가장 흔하고 흥미로운 방식이기도 하다. 이때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의 ‘고백’이자 ‘자의식의 표명’이 된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존 랜도의 말을 빌리면, 예술가 개인의 자의식은 ‘예술적 지위의 척도’이다. 『예술가를 학대하라』에서 천재 예술가들의 후원자를 자임하는 ‘뉴르네상스 재단’의 수뇌 포스터 리포비츠는 그 앞에 ‘고통받는’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예술가의 고통이야말로 예술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최후의 심급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진정한 예술은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미학관에 근간을 둔 한 미디어재벌의 임상실험을 리얼리티쇼처럼 냉정한 시점을 유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로 풀어나간다. 한평생 ‘오직 돈벌이라는 목적에서 영원히 혹세무민하는 무가치한 것들만 만들어낸’ 이 미디어재벌은, 예술 신동들을 선발해 인위적 고통을 가하는 ‘뉴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 대중문화의 위상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전 생애를 참회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 조작된 것임을 모른 채 쇼비즈비스 세계에 착취당하는 천재 소년 빈센트와 이 비밀 프로젝트에 복무할 것을 계약한 매니저 할런의 수십 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스트리아 빈의 젊은 비평가들이 뽑은 청소년소설 상을 수상하기도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최소한의 인성도 문화도 증발해버린 채 오로지 시장과 제도의 메커니즘만 남은 21세기 쇼비즈니스 세계를 시종일관 신랄하고도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조롱한다. “너무 신랄하지만, 이 소설 안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 분노할 수도 없다. 다만 티브이를 켜볼 필요가 있을 뿐”이라는 심사평을 받은 이 소설은, 생의 진실한 가치를 찾는 젊은이들을 위한 훌륭한 성장담이기도 하다. 진실과 가식의 경계가 모호한 빈센트와 할런의 우정 어린 관계와 비극적 이별, 그리고 먼 훗날의 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끝에 독자들은 용서와 구원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독설과 유머로 가득한 문장을 따라 키득대다 몽상과 희망으로 가득한 소설의 끝을 목격하고 나면, 책을 덮고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 여운을 느낄 것이다.
예술가를 학대하라!
그의 피와 눈물로 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라!
너에게 이런 말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 슬픈 일이지. 넌 결코 여자를 사귈 수 없을 거야. 넌 세상을 구하지 못할 거야. 믿을 만한 친구를 만나는 일도 절대 없을 거야. 무언가를 넉넉하게 소유해볼 일도 절대 없을 거야. (…) 인생은 불공평한 것, 네겐 더더욱 그렇단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고독과 고통 속에서 네가 창조하게 될 것이 네 절망과 우리의 잔혹함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뿐. 우리의 고통은 일시적이지만, 너의 작품은 영원할 것이다.
이야기는 온갖 저주로 점철된 이 한 장의 편지로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 편지의 수신자는 일곱 살 난 소년이며, 편지를 쓴 사람은 평생 그의 매니저로 일하게 된 젊은 남자다.
명석한 두뇌 덕분에 일류 사립대를 졸업했지만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해 밴드 활동을 하다 이제는 근근이 음악 비평으로 먹고사는 할런에게 어느 날 ‘뉴르네상스’라는 곳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중문화를 개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것. 뉴르네상스는 비범한 창의력을 가진 예술 신동들을 선발해 교육한 후 그들의 창작물로 대중문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모토로 하는 기업이다. 막강한 권력으로 대중문화를 망쳐놓은 미디어재벌 포스터 리포비츠가 눈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 마지막 참회의 기회로 삼은 사업이기도 하다. 할런은 제안을 수락하고, 신동 한 명을 담당해 그가 지속적으로 걸작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창조적 자극을 받도록 고통을 가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는 퇴락한 액션스타 스티븐 실베인과 짝이 되어 신동들 중 가장 뛰어난 빈센트를 맡게 된다.
할런은 빈센트와 만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위의 편지를 쓴 후 큰 소리로 읽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위로한다, 나는 처음부터 진실을 알려주었다고.
미국 일리노이 주 깡촌에서 창녀나 다름없는 베로니카에게서 태어난 빈센트가 뉴르네상스에 합류하게 된 것은 운명적이다. 이십대라는 젊은 나이에 아빠가 다른 자식 넷을 거느린 베로니카는 오로지 할리우드에 가 연예인이 될 망상에 빠진 절세미인. 계약을 맺기 전 할런은 뉴르네상스가 빈센트에게 가할 고통을 상세히 설명하지만 금전적 보상에 눈이 먼 베로니카는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뉴르네상스 아카데미에 입학한 빈센트는 작곡과 글짓기에 천부적 소질을 보임으로써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예술적 ‘수확’을 위해 할런은 갖가지 방식으로 빈센트를 ‘학대’한다. 빈센트는 사랑하는 개 위노나를 잃고, 사귀는 족족 알 수 없는 이유로 여자친구들은 떠나가고, 소외와 질병에 시달린다. 할런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엄마인 베로니카마저 아들을 버린다. 그런 와중에 빈센트가 작곡한 노래와 시나리오는 프로 가수들에게 고가에 팔리고 티브이쇼로 제작되어 시장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숙명에 대한 고뇌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빈센트의 예술작품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대중의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
배후에 깔린 음모는 알지 못한 채 빈센트는 할런을 최고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다. 뉴르네상스와의 계약은 별도로 할런은 빈센트에게 인간적 애정과 연민을 느낀다. 그는 빈센트를 착취하는 한편 인생의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이 세상에 대안을 창조해줄 예술가로서 키워내고자 한다.
“이런 얘길 왜 해주는 거예요?”
“왜 얘기하냐고? 전부 사실이니까. 넌 모든 문제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도 네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흉한 것 같아요.”
“그렇지. 진실은 흉해. 이런 말로 널 실망시키려는 것은 아닌데, 네가 보는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잘나봤자 한 꺼풀 벗기면 다 해골바가지에 지나지 않아. 생각하면 소름끼치지 않니? (…) 네 주변의 세상을 둘러봐. 어떤 사람들은 ‘아, 그래도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요. 대지 본연의 광채를 봐요. 나무와 물과 풀을 봐요’라고 떠들어댈지도 모르지. 그런데 땅 밑에 정작 뭐가 있을지 생각해본 적 없니?”
“없어요.”
“시체야. 수십억에 달하는 시체들. 그게 뭐가 아름답다는 걸까? 모든 것의 저변은 흉해. 그것을 잊어선 안 돼.”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빈센트는 텅 빈 아파트에 혼자 처박혀 계속해서 대중 예술작품들을 생산해내고, 할런은 미디어에 그것들을 파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빈센트가 쏟아내는 작품들로 뉴르네상스는 재정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빈센트는 자신의 창작품이 벌어들인 수익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수렁으로 빠져든다.
한편 할런은 모니카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가족들에게도 극비로 해두었던 빈센트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에 도덕적인 비난을 받은 할런은 역시 빈센트의 불행에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이제부터는 ‘기만적인’ 착복 관계가 아닌 진정한 인간적인 관계를 갖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예술지상주의를 강조하던 할런이 빈센트의 천재성이 때로 시장의 논리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빈센트에게 인지시킬 수 없게 되면서 둘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조작된 고통 속에서 예술작품을 생산해내는 예술가와 예술의 부흥이라는 미명하에 한 인간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매니저는 과연 어떤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인가?
‘거대 자본이 영감을 대체한 시대의 예술’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예술가 버전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떠올린다. ‘진정한 예술은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낭만주의적인 미학관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뉴르네상스’ 프로젝트는, 결국 그것이 철저하게 기만적인 허위이며 한 미디어 중독자의 오도된 ‘미디어 신화’인 것으로 드러낸다.
“당신이 날 예술가로 키운 방식은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 실험이란 과학적인 거예요. 과학에 예술은 존재하지 않아요. (…) 예술은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거예요. 제작되어서는 안 돼요.”
“동의한다. 그런데도 우리 실험이 성공한 건 왜일까?”
“그건 엔터테인먼트가 거대한 사업이기 때문이고, 사업은 제작이 가능한 거니까요. 스타들도 그렇고. 하지만 난 그 실험이 성공했다고 보진 않아요.”
“왜?”
“내가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게 당신들이 바라던 건 아닐 테니까.”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 예술의 모든 것이 고갈된 시대에 진정한 예술은 가능한가?
* 물질적 풍요가 예술의 고갈을 촉진한 것은 아닌가?
* 비참과 궁핍을 설정할 수 있다면 진정한 예술의 도래는 가능한가?
* 지적 속물들의 철옹성 안에 갇혀 있는 죽은 예술이 아니라 주류 대중이 쉽게 접하고 호응하면서도 작품성을 갖춘 예술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은 아닌가?
대중 예술이 규격화된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기획되고 생산되는, ‘산업으로서의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가 된 지는 벌써 오래다. 인간의 진정한 경험에서 탄생한 전통적 미디어 예술은 이제 거대자본의 투입이 ‘영감’을 대체한 기획사의 ‘아이돌 양산 시스템’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분기별로 ‘신상’을 선보이듯 새로운 스타들을 내보내고, 이 스타들은 시장의 논리와 전망을 읽어내는 기획자들의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인다. 우리가 티브이와 라디오를 통해 보고 듣는 그것들은 예술인가, 아니면 대형 할인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공산품과도 다름없는 영혼 없는 상품일 따름인가. 스물네 시간 동안 재방송에 재방송을 거듭하는 티브이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가 한번쯤은 숙고해봐야 할 문제다.
『예술가를 학대하라』에 쏟아진 찬사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끊임없이 대중문화를 생산해내는 미디어머신에 관한 예리한 코멘트이다. 읽는 내내 우리는 즐거워하다가, 생각에 잠기고, 몸서리치다 마침내 슬퍼진다. 조이 고블은 재기발랄하고, 신선하고,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는 적확한 목소리다. 라이브러리 저널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자기 세대에 방종과 기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브렛 이스턴 엘리스가 『제로 미만』으로 1980년대에 같은 일을 했듯, 조이 고블은 우리 세대의 목덜미를 잡아 비틂으로써 시대정신을 표현했다. 페이지스 매거진
젊은 독자들의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소설. 이 소설은 묻는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거짓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슈피겔
조이 고블 같은 젊은 작가가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 디 벨트
놀랍도록 과감하고 독창적인 소설. 미국 문화에 대한 우스꽝스럽고 가차 없는 해부. 앤드루 데이비스(시나리오 작가, <오만과 편견> <티핑 더 벨벳>)
놀랍도록 독창적인 젊은 작가가 쓴, 유쾌하게 새디스틱한 이야기. 문단은 그의 미래를 흥미롭게 주시할 것이다. 폴 웟킨스(소설가)
만약 카프카가 21세기에 살고 존 스튜어트만큼 웃긴 사람이라면 『예술가를 학대하라』와 같은 소설을 썼을 것이다. 쿠리에 저널
극악하고, 야비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곧 실현될 우리의 ‘현실’이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테체트 뮌헨
만약 우리가 조이 고블의 상상력을 병조림해 판매한다면 우리는 모두 갱생원행일 것이다.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이야기한다, 와인프레스 안에 포도를 넣고 짜내듯 온갖 방법으로 예술가를 쥐어짤 수 있다고. 『예술가를 학대하라』는 새 빈티지 포도주처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조이 고블은 미국 현대소설계의 분더킨트다. 에드 맥클러너한(소설가)
완벽하게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파괴되고 또 파괴된 소설 플롯을 체험하고 싶다면 조이 고블을 읽어야 한다. 『예술가를 학대하라』에 이르러 고블은 시적 논리로 구성된 퍼즐게임을 완성시켰다. 편지, 시나리오, 단편소설, 신문 광고, 전화 대화 등을 차용함으로써 고블은 무적의 성대모사로 작가적 재능을 드러낸다. 디 차이트
조이 고블 Joey Goebel
1980년 미국 켄터키 주 핸더슨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소설작법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글쓰기보다 먼저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음악, 그 중에서도 펑크록이다. 주체하지 못할 음악적 열정으로 언더그라운드 펑크밴드 ‘멀리츠Mullets’를 결성, 기타리스트 겸 리드싱어로 활동하며 오 년간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그러다 대학시절 교수들의 조언을 떠올리고 다시 글쓰기에 전념, 밴드 활동 경험을 모티프로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저부가가치한 삶들이 결성한 이색 펑크밴드의 이야기를 담은 이 시나리오는 그러나 끊임없이 외면당했고, 고블은 이를 소설로 각색해 마침내 2003년 『변태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변태들』은 2007년 독일 루프티 청소년소설 상을 수상했다. 2004년 두번째 소설 『예술가를 학대하라』를 발표, 30세 미만 영미권 작가들의 최고 영예인 딜런 토머스 상 후보에 오르고, 2006년 오스트리아 빈의 젊은 비평가들이 뽑은 청소년소설 상을 수상했다. 2008년 세번째 소설 『공공의 재산』을 발표했다.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데드 밀크맨이고, 가장 좋아하는 티브이쇼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펀치 드렁크 러브>이다.
옮긴이 최세희
국민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전문번역가,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현재 EBS 라디오
* 2008년 9월 20일 발행
* ISBN 978-89-546-0667-7 03840
* 140*210(무선) )
* 560쪽
* 가격 13,000원
* 책임편집 김지연 (031-955-8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