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 『사막』출간!
2008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이 드디어 르 클레지오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받을 만한 작가가 받았다’라는 평가와 함께 세계인의 주목을 끈 르 클레지오. 그의 후기 대표작인 『사막』이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크게 두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1963년 르노도 상을 수상하며 그를 작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해준 데뷔작 『조서』가 현대문명의 난폭함과 현대인의 정신적 공황을 다룬 초기 대표작이라면, 1980년 발표, 아카데미 프랑세즈 그랑프리 상을 수상한 『사막』은 그가 그러한 공황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을 탈출하여 자연으로 회귀함으로써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원시의 힘을 발견하는 후기 대표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꾸준히 발전하여, 『황금 물고기』『우연』『성스러운 세 도시』등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우연』과 함께 그의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로도 꼽히는 이 작품 『사막』은 저 멀리 사하라 사막을 무대로 르 클레지오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재능을 가장 감각적이고 스케일 크게 그려낸, 그야말로 세기가 지나도 기억될 ‘명작’이다.
소설 내용: 아름답고도 광활한 자연에 대한 신화적 서사시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편집상으로도 구분이 되는 이 두 이야기는, 하나는 현재 시점인 랄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1900년대 초, 유럽 군대가 사막을 정복하면서 대대로 사막에 뿌리를 두고 살았던 사막민족들이 와해되어가는 비극적 역사의 한 장면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각각 전개되지만, 독자는 랄라가 바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사막민족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청색인간’으로 불렸던 사막의 용맹한 투사들, 그들의 피가 랄라를 통해 랄라의 아이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은, 서구 문명에 밀려 사라진 사막민족과 그들이 숭배했던 자연에 바치는 작가의 경의로도 읽힌다.
20세기 초, 누르
서구 제국주의가 날로 강성해지던 20세기 초, 사하라 사막이 서구 군대에 점차 점령되면서 사막민족들은 끝없는 유랑길에 오른다. 유랑민들은 대족장 마 엘 아이닌이 있는 성도(聖都) 스마라로 몰려든다. 그들은 기적과도 같은 힘을 지닌 대족장이 지친 유랑민들을 구원해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결국 마 엘 아이닌은 스마라를 포기하고 다시 북쪽으로 피난 갈 것을 결정하고, 사막의 이쪽 지평선과 저쪽 지평선을 잇는 끝도 없는 유랑민의 피난 행렬이 시작된다. 몇 달, 몇 년을 이들은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사막을 떠돌다가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피로로 하나둘 쓰러져간다. 대족장 마 엘 아이닌은 사막의 동지들의 구원을 기대하지만, 이미 대부분 다 변절하여 서양과 손을 잡았거나 더이상 힘이 없는 무리들일 뿐이다. 무기 하나 변변하지 못한 사막의 전사들은 결국 대부분 서양 군대에 궤멸되고, 신비로운 능력의 성자였던 마 엘 아이닌마저 사막 한복판의 오두막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유랑민 소년 누르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는 이 모든 비극적인 역사를 지켜보며 마 엘 아이닌의 임종에 함께 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자기 민족을 바라보며 사막에 홀로 남는다.
사막민족의 족장 마 엘 아이닌은 실존인물로, 르 클레지오가 아내 제미아와 함께 쓴 『하늘빛 사람들』에도 마 엘 아이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하늘빛 사람들』p.47~ ). 제미아는 마 엘 아이닌과 인척간으로, 이 소설 『사막』의 주인공 랄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사막』은 르 클레지오의 아내인 제미아의 ‘잃어버린 유산’과 뿌리 찾기의 열망과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함께 녹여낸 르 클레지오의 사랑이 융합되어 탄생한 작품이며, 서구 기독교적 정복자 문명과 이슬람 피정복자 문명이 결합된 작품인 것이다. (『사막』p.473, 홍상희,「작가 소개 및 작품 해설」중에서)
현대, 랄라
청색인간의 후예인 랄라는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사막의 소녀이다. 사막 인근의 빈민촌에서 고모와 함께 살아가는 고아지만, 그녀는 사막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살갗을 태우는 태양, 숨 막히는 열기,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는 모래바람, 붕붕거리며 날아드는 파리와 말벌, 맨발바닥을 찌르는 엉겅퀴, 영웅과도 같은 자태의 흰 갈매기, 그리고 끊임없이 모양이 바뀌는 모래언덕과 막막한 바다, 수평선, 이 모든 자연은 그녀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랄라의 친구는 어부인 나망 노인과 목동 하르타니이다. 랄라랄라처럼 이들도 자연 속에서 지혜를 얻는 인물들이다. 특히 하르타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자연의 아이들인 둘 사이에 인간의 언어는 필요 없다. 서로 마주보는 시선과 둘을 둘러싼 자연의 변화만으로도 둘은 충분한 교감을 이룬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도시에서 나이 많은 남자가 찾아와 여러 가지 물건들로 현혹하며 랄라와 결혼을 추진하자, 랄라는 이를 피해 목동 하르타니를 찾아간다. 이들은 사막 한복판으로 도피하지만 결국 하르타니는 떠나고, 랄라는 하르타니의 아이를 가진 채 적십자단의 개입으로 프랑스의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보내진다.
이제 차갑고 물질화된 도시에서 랄라의 삶이 시작된다. 가난한 이주자인 랄라에게 도시의 삶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흐릿한 눈길의 남자들은 성숙한 소녀인 랄라를 음탕한 눈길로 좇고, 관리들은 고압적이다. 사막에서 랄라가 좋아했던 파리는 도시에서는 그저 불결한 벌레일 뿐이며, 사막의 해변에서 아름다웠던 갈매기는 그저 지저분한 항구를 날아다니며 먹이를 구걸하는 거지 새일 뿐이다.
하지만 자연의 구석구석 작은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교감하던 랄라는 똑같은 예민함과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도시에서 버림받은 자들, 거지, 매춘부, 부랑자를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낱 삼류 호텔 청소부로 일하지만, 늘 사막의 태양을 갈구하는 그녀는 어느새 여느 도시인과는 다른, 감히 아무도 범접 못할 특별한 아름다움을 풍기게 된다.
어느 사진사가 우연히 그녀를 보고 그녀의 사진을 찍게 되면서 그녀는 유명 모델이 된다. 그리고 문명인들은 그녀의 또렷한 윤곽, 구릿빛 피부, 약간 냉소적인 미소, 그리고 그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매료된다. 팬레터와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지만 랄라는 이 모든 것에 무심하다. 그녀는 돈을 원하지 않으므로 사진사가 주는 돈도 받지 않는다.
사막의 소녀 랄라가 도시인들에게 전파하는 힘, 그 영감은 어느 무도장에서 절정을 맞는다. 춤추는 사진을 찍으러 사진사와 함께 현란한 무도장에 간 랄라는,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춤, 스텝도 형식도 없지만 마치 사막의 명령인 듯 뭔가 영감에 이끌려 미친 듯이 추는 춤으로 무도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취시킨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춤을 따라 하고, 그녀는 분출의 절정에 이르러 쓰러진다.
그리고 랄라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온다. 부른 배를 안고. 그녀는 엄마가 그녀를 낳았을 때처럼, 사막 바닷가에서 홀로, 무화과나무의 굵은 가지에 매달려 아이를 낳는다. 청색인간의 후예가 탄생한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문학적 탐구: 자연 속 자유로운 삶을 향한 시적 모험의 세계
랄라의 가치관은 언제나 자연에 있다. 그리고 고모에게 항상 엄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는다. 자연은 때로는 광폭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 적응하며 자연의 법칙에 순종한다. 이 소설의 중간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랄라의 조상 청색인간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 사막의 유랑민들은 사막을 떠돌며 그들의 생명력을 이어나간다. 황폐하고 광활한 곳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신을 찬양하고, 때로는 침입자에게 짓밟혀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시 침묵하며 일어선다. 신을 경외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선하고도 숭고한 느낌을 선사한다.
‘누르’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 부분들은 소설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편집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는 이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랄라의 이야기와 마주치진 않지만 랄라의 과거를 되짚는 멀고 먼 태고의 신화 같은 역할을 한다.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뛰어넘어 엮인 두 이야기의 조화를 통해 르 클레지오는 신을 찬양하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나가는 인간들의 모습, 현대인이 잊고 있던 신화적이고 고요한 삶을 되살린다. 따라서 랄라와 과거 이야기의 교차는 단지 다른 두 이야기가 아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과 영국인 사이에 태어난 정통 유럽인인 르 클레지오가 유럽과 영미의 문명 ― 흔히 우리가 더 발전했다고 믿어온 ― 을 부정하고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아프리카, 자신이 선택해서 정착한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일견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스스로 “프랑스인인 동시에 아프리카인”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르 클레지오는 서구인과 서구 세계를 동경해온 비서구인에게 역시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천재는 의지로써 되찾은 어린 시절일 뿐이다”라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르 클레지오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 세상에 대한 어린아이의 지각과 그 주위의 자연과 생명의 조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후 그의 작품의 동향은 현대 도시와 기계 문명의 어두운 면에서 차츰 벗어나 마치 광물들의 이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확고부동하고 매혹적인 힘, 감성과 침묵의 시적 서정성을 다시 회복한다. (…) 『사막』은 현대 서구 문명 속에 갇힌 원시적 순수한 정신과 감수성과 그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르 클레지오가 서구가 아닌 다른 수많은 문화권으로 그토록 여행을 하고 거기서 체류하면서 찾고자 하는 것, 거기서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엿보게 된다. (『사막』pp.471~472, 홍상희,「작가 소개 및 작품 해설」중에서)
우리가 흔히 잊고 살던, 과연 존재하는지조차 망각하고 살던 ‘사막’이라는 공간. 그 공간을 서구 문명의 냉혹함과 대비하여 아름답게 그려내는 르 클레지오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생에 대한 즐겁고 순수한 의지와 함께 사막 한복판에서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절실히 받을 것이다.
여행과 글쓰기: 감각적인 동시에 고요한 문장들
- “사막,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쓴 소설” (『리르』지 )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은 지금-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의 눈길은 항상 저 먼 곳에 머물러 있다. 그는 여행하는 작가이며, 여행지는 서구가 그동안 망각한 채 지냈던 제3세계인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이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그러한 공간은 낯설고 비루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현대인에게 가슴 두근거리는 인류의 시원으로 데려가준다. 그가 그려내는 장소는 더이상 외면 받아왔던 장소가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이유 모를 막막함과 외로움, 스트레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생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삶을 향한 강인한 의지만이 있을 뿐.
이렇듯 르 클레지오에게 여행은 글쓰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의 경험은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나오고, 그의 소설은 흔히 여행지를 스쳐 지나간 후 쓰는 피상적인 여행기가 아닌, 그 장소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는 소설로 승화된다. 그의 지향점은 언제나 서양 혹은 현대 물질문명에 대비되는 자연 그대로의 삶이며, 그는 그곳에 철저히 동화된다.
『사막』속 문장을 읽다보면 너무나 감각적이고 상징적이라 마치 웅장한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동시에, 표현하기 어려운 제3세계 부족의 생활양식이나 종교의례 장면은 마치 잠언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용히 읊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르 클레지오는 그야말로 천혜의 재능을 가진 천재적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르 클레지오는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직접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의 숨겨진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삶과 문화를 발견하고 글로써 그것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은 감각적 이미지와 깊이 있는 문장들로 우리를 소설을 읽는 순수한 희열의 세계, 지금-여기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독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언론 리뷰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북아프리카 사막의 잃어버린 문화가 잘 그려진 작품이다. _스웨덴 한림원
형이상학적이고, 웅장하고, 시적이고, 너무나 몽상적인 소설. 『사막』은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_베르나르 피보 Bernard Pivot (프랑스 문학평론가)
그의 언어는 현학적인 느낌 없이 단순하고, 우아하며 섬세하다. 나는 이 작품이 마치 인상주의자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 모든 색채, 소리, 냄새, 감각… 정말 매혹적인 책이다. _아마존 프랑스 독자 리뷰
르 클레지오는 무소유의 기쁨과 방랑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과 자연 속에 인간과 태양과 동물들이 한 리듬으로 어우르며 사는 단순한 삶의 기쁨, 자연에의 귀의를 권유하며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인 자연, 녹색 낙원으로의 귀환을 재촉한다. _정혜숙 (전남대 교수 · 불문학)
본문 발췌
그곳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세계였다. 금속과 시멘트의 도시가 아닌, 이 모래, 이 돌, 이 하늘, 이 태양, 이 침묵, 이 고통은 샘이 흐르는 소리와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그들의 세계였다. 자연의 질서만이 군림하는 이곳 사막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고,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의 주변을 한 점 그늘도 없이 걸어갔다. (p.22)
불안할 때, 혹은 반대로 아주 행복할 때면 그는 멈춰 서서 랄라의 양쪽 관자놀이 위에 두 손을 얹는다. 만지지는 않고 머리 양쪽으로 손을 뻗치고서 한참을 그렇게 있으면, 그의 얼굴이 아주 환하게 빛난다. 그러면 랄라는 그의 손바닥의 온기가 그녀의 뺨과 관자놀이에 전해져서 불기운처럼 그녀를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그녀 몸속 깊이 파고들어와 그녀를 행복으로 가득 채우며, 그녀의 긴장을 스르르 풀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랄라가 하르타니를 좋아하는 것은, 특히 이런 점 때문이다. 그는 두 손바닥에 이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진짜 마술사인지도 모른다. (p.133)
이따금 하와는 그를 쳐다본다. 식당에서, 공항 대합실에서,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녀의 두 눈의 시선은 단지 그들을 말소시키고 종국에 가서는 그들 자신이 귀속하여야 할 허무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만 같다. 그녀의 이런 이상한 시선을 볼 때면 사진사는 추위가 몸속을 파고드는 듯한 전율을 느낀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가 없다. 아마 랄라 하와 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그 눈으로 이 세상을 쳐다보고, 판단하는 것이리라. 이런 순간에도 거대한 도시와 강, 광장, 거리 등,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막막한 사막과 모래, 하늘, 바람만 보이는 것 같다. (p.374)
그녀는 떠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새처럼 구름을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서 춤을 춘다. 그녀의 맨발 아래에서, 비닐 바닥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벼워지며 모래 같은 색깔로 변한다. 그녀의 몸 주위에서 바람과 같은 속도로 공기가 회전하고 있다. 춤으로 인한 현기증으로 빛이 반짝거린다. 그 빛은 조명의 거칠고 차가운 빛이 아니다. 대지와 바위, 하늘조차도 하얗게 보이는 아름다운 햇빛이다. 전자음악, 기타, 오르간, 북들이 내는 느리고 무거운 음악이 그녀 몸 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리조차 듣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음악이 어찌나 느리고 깊은지, 그녀의 구릿빛 피부, 머리카락, 눈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것 같다. 춤의 도취가 그녀의 주위에 전달된다. 남녀가 모두 한순간 멈추더니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pp.379~380)
고통 때문에 시간의 속도가 늦추어졌다. 시간은 심장의 박동과 숨 쉬는 폐의 리듬을 따라, 자궁 수축의 리듬을 따라 맥박친다. 랄라는 무화과나무 둥치에 기대어 천천히 굉장히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듯이 자기의 몸을 일으킨다. 옛날 그녀가 태어날 때 그녀의 어머니를 도와준 나무처럼 이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 나무밖에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조상의 몸짓을 되풀이한다. 그 몸짓의 의미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녀 개인을 초월하여 전달된 것이다. (pp.445~446)
자유로 가는 길은 끝이 없었다. 자유는 막막한 대지처럼 광활했으며 빛과 같이 아름답고 잔인하며 눈물처럼 감미로웠다. 매일 첫 새벽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향해 남쪽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자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으로 돌아갔다. (pp.463~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