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맹렬한 속도로 발전해온 세계는 이제 모든 분야에서 과거와 구별되는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시스템의 기본 가정은 성장과 팽창의 인플레이션이었다. 이제 생활방식에서 사고체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제 성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디플레이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저성장, 고실업, 고령화 시대를 사는 21세기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구조적인 저성장 국면, 만성적 고실업의 위기, 고령화 쇼크, 갈등 공화국……. 최근 한국 경제와 사회를 진단하면서 거론되는 단어들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와 세계사적인 변화를 디플레이션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한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증권가에서 손꼽히는 투자전략가이자 명강사로 유명한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분석부장. 세계적 차원의 변화와 한국 사회의 갈등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분석은 신선하면서도 역사와 시장을 꿰뚫는 깊이가 있다.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초저금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청년 실업은 늘어만 가고, 인구는 날이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으며, 아이들은 게임의 가상 세계가 현실의 사고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무장하고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던 미국은 이제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대 갈등, 기득권 갈등, 보혁 갈등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해관계의 대립은 연약한 인간을 무자비한 제로섬 사회로 이끌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세계를 디플레이션의 세계로, 현재를 디플레이션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이제는 성장 중심의 인플레이션적 사고에서 벗어나 디플레이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근대 이후 맹렬한 속도로 성장, 팽창해온 세계가 이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디플레이션의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한다.
디플레이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자
사전적 의미의 디플레이션이란 물가 하락이 지속되면서 실업률이 상승하는 경기 침체를 뜻한다. 저자는 여기에 산업화, 정보화 등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 경제적 변화, 고령화라는 구조적 변화,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초래한 갈등과 불안정까지 고려하여 디플레이션 시대를 분석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시대의 경제적 특징으로 4저(저투자, 저금리, 저물가, 저성장) 1고(고실업), 1단(짧은 경기순환 주기)의 상황을 들 수 있다. 이는 기존의 경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다. 세계는 1) 과학기술의 발달 2) 이데올로기 시대의 마감 3) 세계화 4) 자원 고갈과 환경 문제 5) 인구 감소와 고령화 등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동안 보편적이던 상식들이 디플레이션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1) 상시적 갈등구조 2) 무한 경쟁의 국제관계 3) 미국의 재해석 4) 자생적 사회주의의 출현 가능성 5) 추락하는 국민국가 6) 사회안전망의 붕괴 7) 자산관리의 변화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아울러 다양한 각도에서 디플레이션의 충격을 완화할 대응책을 모색한다.
저자는 위기를 과장하고 거창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디플레이션 시대의 특징과 원인을 실증적이고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단과 분석은 신선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4저 1고 1단의 디플레이션 시대에서 살아남기
사회 각 부문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조그만 충격에도 크게 흔들릴 정도로 사회의 변동성은 커지며,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현재 중심의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등 이 책이 그리고 있는 21세기의 사회는 다소 암울하다.
저자는 이러한 디플레이션 상황의 도래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현실적 해법으로 적응력을 키우고 현상을 완화시키는 연착륙(soft-landing)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인류 모두가 균일하게 이기심을 줄일 수 있다면 디플레이션 상황은 발생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의 원인과 특징, 이로 인한 사회 전반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1) 개인 간의 사적 관계는 능력과 경쟁이, 2) 국민국가 차원에서는 분배와 평등이 더 중요하며 3) 국가 간의 국제관계는 제로섬 게임의 완전경쟁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의와 평등, 인류애와 공동선 등 이상주의가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디플레이션 극복의 일시적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지만, 디플레이션의 해법으로는 이상주의의 확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정의롭고 강한 정부가 요구되고, 기업과 시민단체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며, 개인 차원에서는 인문학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 현실주의적 인식과 이상주의적 접근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거대 담론의 쉬운 기술 - 경제전문가가 종합한 21세기 미래학
저자는 거대한 주제를 역사에 대한 이해와 경제적 관점을 조화시키고 구체적인 데이터와 실증적인 분석을 곁들여서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디플레이션 시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기술은 그 한 예일 것이다.
디플레이션 사회는 마치 사춘기의 청소년처럼 쉽게 흥분하고 절망하고 공격적이다. 때로는 갱년기의 중년과 같이 우수에 젖기도 하면서 감정적인 변화가 심하다. 그러나 이런 사춘기와 갱년기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도기이다. 디플레이션 상황도 성숙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사춘기나 갱년기와 유사하기 때문에 갈등을 수반하는 과도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또한 음반시장의 디플레이션 사(士)자의 과잉 시대 부전자전(父戰子戰)에서 3대 전쟁(3代戰爭)으로 지하철의 세대 갈등 디플레이션, IT 그리고 러브호텔 2세의 콤플렉스 ‘야쿠자와 디플레이션’ 등 중간 중간 삽입된 칼럼들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저자는 증권사관학교라 불리는 대우증권의 투자분석부장으로 있으며, 증권가에서 손꼽히는 투자전략가이자 명강사로 유명하다.
[지은이의 말]
최근의 경기 침체는 침체의 정도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 과거와는 근본적인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대부분의 환경이 달라지고 갈등이 상시화 되면서, 인간관계, 사회구조, 정치제도, 경제행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를 거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진행된 산업사회와 최근의 정보사회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즉 역사가 바뀌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세계를 디플레이션 세계로 규정한다.
한국은 현재 갈등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사회 전 분야에서 치열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다. 갈등의 주제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한쪽 갈등에서 승리하면 다른 갈등에서 패배하는 등 갈등이 다양해지고 그 강도는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갈등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 갈등을 통해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제도를 만들어간다면 한국은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분석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