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호 교수(고려대 한문학과)는 동양 고전의 번역과 대중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학자이다. 이 책은 그가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성격에 따라 가려 모은 첫 산문집이다. 책 속에는 고전 연구에 인생을 건 학자로서의 엄정한 삶의 자세와 세계를 마주하는 자기 성찰적 시선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저자는 산더미 같은 한문 고적들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당대의 구체적 현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인 셈이다. 때로는 긴장과 반성을 촉구하고 때로는 여유와 웃음을 전하는 글들을 읽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21세기를 고전학자로 산다는 것은
책은 80여 편의 글을 4부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1부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꾼인 저자의 신실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공부론을 엿볼 수 있다. 고전 연구자로서 생각하는 진정한 공부의 의미, 우전 신호열, 서여 민영규, 문자학의 대가 시라카와 시즈카를 비롯한 여러 스승들과의 뜻 깊고 훈훈한 인연, 우리 학문의 현실과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 등을 풀어냈다. 올바른 지식인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시대를 초월하는 지식인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숙고하게끔 하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2부 ‘책 읽는 풍경’은 고전의 매력과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글들이다. 광범위한 독서가이자 서평가이기도 한 저자는 동양의 주옥같은 고전들과 그 정수를 쉽고 친절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논어』『맹자』『사기』『열하일기』 등 명저의 역사적 의미와 맥락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고전을 정확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일반인들도 고전은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좀더 적극적으로 고전 읽기에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3부 ‘지금은 쓰이지 못하지만 뒷세상엔 영원하리라’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성사의 빛나는 편린들을 담았다. 저자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약용, 이건창, 정인보, 요시카와 고지로 등 근현대 역사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삶, 뛰어난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짧은 전기와 평전의 형식으로 드라마틱하게 그려 보인다. 저자의 냉철한 역사의식과 예사롭지 않은 필봉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무게감 있는 글들이다.
4부 ‘탐구와 접속’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단상들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평(時評)들을 모았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적확하고 기지 넘치며 균형 잡힌 발언들에서는 촌철살인과 함께 풍부한 유머가 느껴진다. 시대의 다양한 영역을 읽어내는 현대적 감각과 감수성 넘치는 글쓰기는 경쾌하기까지 하다. 더불어 여기에 실린 글들은 학자의 현실에 대한 발언과 직간접적 참여가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매 순간 허무와 싸우고 있는 한 인간의 고뇌를 남들이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담아 책을 낸다고 말한다. 과연 21세기를 고전학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속도광들의 시대에 시간이 멈춘 아득한 시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책들 사이를 헤집으며 현실과의 소통의 지점을 모색하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허무와 싸운다’는 것은 혹 그 끝없는 고군분투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저자는 이 의문들에 대한 답을 모두 이 책 곳곳에 ‘몰래’ 적어두었을 것이다.
책의 출판은 곧 오자와의 싸움이다. 오자에도 물론 두 가지가 있다. 저자 자신이 애초 잘못 집필한 경우와 출판 준비과정에서 지시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경우다. 후자라도 실은 저자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 점을 또렷이 자각하기에, 자기 책의 오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정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판을 거듭하면서 오자를 조금씩 고칠 수 있을 때는 괜찮지만, 출판사에서 예고 없이 중판을 하는 일도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증정본에 가필을 하는 행각을 벌이게 되었다. 다른 연구실에 들렀을 때 증정본이 눈에 띄면 꺼내서 가필을 한다. 심지어 공공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에서도 혹 졸저가 눈에 띄면 몰래 꺼내서 살짝 써넣어둔다. 아아, 나는 희극의 주인공이 될 만한 우스꽝스런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자기 책을 몰래 고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