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할 수가 있을까
지금보다 더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제보다 오늘 이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까? 황경신 작가는 미발표 신작『종이인형』에서 열다섯, 무지개빛 색깔을 담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노래한다. 하지만 ‘사랑 동화’라고 해서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마시멜로처럼 한없이 말랑한 ‘사랑’만 기대했다면 조금 더 찬찬히 읽어봐야 한다. 어쩌면 그녀가 사랑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모든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라는 ‘be my Muse’의 한 구절이 그녀가 노래하는 사랑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사랑이 머물던 자리에 탄생한 황경신의 동화는 비오는 날 남겨진 빈 라테 잔과 같이 쓸쓸하고도 애틋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죽을 만큼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죽을 만큼 행복한데, 난 그 행복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은, 그 벅찬 시간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이제 곧 망가지고 망가뜨리고 심장이 멎을 만큼 고통스러울 거야, 안 그럴 리가 없잖아. (‘엔딩 크레디트’ 중에서)라며 사랑과 행복의 또다른 이름 슬픔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할 수가 있을까, 지금보다 더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제보다 오늘 이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오직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라며 가슴 터질듯 짓눌러오는 사랑의 ‘흔적’ 앞에서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나이는 지났지만, 아직도 사랑이라 부르지 않아도 사랑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기다리며(차라리 체리파이), 언제까지나 그리워하며 그럼에도 사랑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황경신 월드’의 언어와 미학들.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아련함과 먹먹히 가슴을 적셔오는 슬픔이 사랑이란 식물을 기르는 거름이자 물이다. 동화라는 순수한 공간에서 사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순간에 찾아온 비극(팝콘 파라다이스)과 비극의 끝에서 시작된 사랑(라임 라이더)이 교차한다. 사랑이 끝났다고 체념한 순간 사랑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얻고(아무도 말한 적 없는 슬픔), 아보카도들과의 대화를 통해 거의 포기했던 사랑을 다시 이어간다(아보카도 아지트). 끝내 피지 못한 꽃망울 같던 빛바랜 시간도 기억 너머로 출렁인다. 사랑스런 연인의 옛 연인의 존재에 집착하며 소심해지다가 결국 진실을 회피하고(당신은 재즈처럼), 한 여인의 파티 같은 장례식장에 그녀의 옛 남자들이 모두 모여 대화(좋은 시절)를 나누기도 한다.
모두 색다른 이야기 같지만 결국 슬픔도 기쁨도 모두 안고 있는 ‘사랑’이란 하나의 얼굴이다. 슬픔의 식물을 키우며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하다가 가벼워지라고 위로를 건낸다(안단테 아르페지오). 그리고 ‘성장’과 ‘어른’이란 이름으로 잊고 지내라 강요되는 감정들과 이미 잊어버린 기억들 속에 무뎌진 시간들을 엉뚱한 상상력으로 새롭게 빚어낸다. 충동적으로 떠나며 시작되는 ‘아마도 아스파라거스’, 설정 자체만으로도 먹먹해지고 아련한 ‘아델라이데’, 끝을 앞두고 드러나는 애틋한 드라마 ‘목성의 마지막 오후’는 상상의 시공간 속에서 그 시절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립지만 외롭지 않았던, 행복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날들. 그 짧고 강렬한 햇살과 같은 추억의 단편들. 사랑을 둘러싼 천변만화 같은 동화에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이해정 외 7명)의 참신하고 다양한 일러스트가 예쁘게 입혀져 더욱 동화의 품격과 사랑을 높인다.
사랑은 좀 더 무겁고 깊은 무엇이어야 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무겁고 깊은 무엇의 중심에 존재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 시작하거나 유지하거나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완벽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랑을 모욕하는 일이다. 라는 ‘라임 라이더’의 한 구절처럼 황경신 작가는 애틋한 그리고 너무나 완벽한 그 이름 ‘사랑’을 노래한다. 크고 작은 설레는 꿈을 꾸며 늘 마음 깊이 사랑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아파했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사랑 동화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