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고리키 소설 맞아?”
새로운 형식, 색다른 어조로 탄생한 막심 고리키 마지막 단편집!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 러시아 문학의 심장 막심 고리키의 마지막 단편집 『대답 없는 사랑』이 출간되었다. 잘 알려졌듯 막심 고리키는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과 같은 황금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20세기 초 러시아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별다른 계급의식이 없던 노동자가 철의 혁명가로 성장하고, 이를 지켜보던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의 혁명 운동에 동참하게 되는 『어머니』는 그의 소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막심 고리키’ 하면 여전히 혁명과 이념, 노동 운동, 깃발, 계급 갈등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고리키 소설은 우리의 70, 80년대 시대 상황과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고리키는 사실 이념보다 인간, 도구로서의 문학보다 예술로서의 문학을 지향한 작가였다. 막심 고리키의 마지막 단편집 『대답 없는 사랑』에서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고리키의 이미지를 벗어나 전혀 고리키답지 않은,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충만해 있는 고리키를 만날 수 있다. 독자들로서는 ‘이거 정말 고리키 소설 맞아?’ 하며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답 없는 사랑』은 고리키 자신의 자전적 체험이나 현실 묘사보다는 예술적 상상력과 구성력에 기대어 그전까지와는 다른 어조로 인간과 세계를 그려낸다. 오십이 넘은 나이의 고리키는 수많은 역사적 현장과 사상적 격류를 헤치고 나온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새롭고 인간적인 세계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자신이 걸어온 혁명적 삶과 인간 세계의 논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색다른 어조, 다른 세계! 이를 위해 그는 이제까지의 자신과 자신의 문학, 삶과 인간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사상적 입장을 완전히 혁신하고, 대담한 문학적 실험과 예술 그 자체로서의 소설 쓰기에 몰두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 러시아 문학의 심장 막심 고리키
이념의 깃발을 내리고 새로운 프리즘으로 바라본 아홉 편의 인간 희비극!
이 단편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은 그 독창성과 시대를 앞선 새로움으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세상과 떨어져 은둔해 살지만 사람들과 따뜻한 인간적 소통을 나누는 은둔자를 그리는가 하면(「은둔자」) 평생 한 여배우를 사랑해 그녀를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한 번도 사랑의 대답을 들어보지 못한 한 사나이의 애절하고 가슴 아픈 회고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대답 없는 사랑」). 또한 완결되지 못하고 잊힌 소설의 주인공이 현실세계로 걸어나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키려 한다는 독특한 상황을 통해 작가와 작품의 주인공, 독자의 관계에 대해 대담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문학적 실험을 시도한다(「어떤 소설」). 소리와 색의 환상적인 결합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통찰, ‘건전한 현실’의 맹목성과 단조로움을 드러내고 있고「(푸르른 삶」), 연극배우들의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충돌, 작가와의 겉도는 대화 등을 통해 삶의 무질서를 표현하기도 한다(「무대 연습」). 혁명과 혁명기 인간의 삶, 그 내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집요하게 파고들며 이제까지 알려진 고리키와는 전혀 다른 사상적 입장과 태도를 내보이는 작품들도 있다(「영웅」 「카라모라」 「에피소드」 「특이함에 대하여」).
고리키 소설의 새로운 시각은 무엇보다 인간관의 새로움에 나타나 있다. 그의 초기작에는 영웅적인 인간상이 낭만주의적으로 그려져 있고, 이러한 적극적이고 낭만적인 인간상은 중기를 거치면서 강인한 의지를 가진 혁명적 인간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고리키는 자신의 이념을 직선적으로 대변하는 단색적 주인공이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해 긍정적이면서도 비관적이고, 이념적이면서도 탈이념적인 ‘알록달록한 다색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주인공에 주목한다. 이 작품집의 여러 주인공들에게서 우리는 고리키가 그리고자 한 이러한 인간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첫 단편 「은둔자」의 주인공 사벨은 산속에 동굴을 파놓고 살아가는 은둔자이다.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특히 여자들)은 그에게 이런저런 삶의 문제를 상담하러 찾아오곤 한다. 그의 외모는 매우 혐오스럽다. 그러나 흉측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벨은 사람들에게 숨은 현자처럼 사랑을 받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을 통해 선한 생활과 신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준다. 사벨의 신은 엄격한 계율로 벌하거나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경건한 신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살아 있는 신이다. 그에게 신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삶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은 도덕적 훈계나 종교적 설교로써가 아니다. 그 어떤 논리적 설득이나 주장에 앞서, 진정한 사랑의 힘이 사벨이 사람들에 대해 지닌 권력이다. 화자인 ‘나’는 사벨이 사람들을 부를 때 거의 노래하듯이 발음하는 ‘밀라야’(러시아어로 ‘사랑하는, 다정한’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라는 말에 전율할 듯한 감동을 받는다.
“오, 밀라야……”
나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익숙한 단어에 그렇게 기쁨에 찬 다정함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제 그는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이듯이 빠르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어깨를 톡 치자 여인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휘청했다. 몸집이 큰 아낙이 노인의 발치에 있는 바위에 단정하게, 마치 부채처럼 치마폭을 펼치며 앉았다.
“개, 돼지, 말, 온갖 짐승도 사람의 분별력을 믿고 따르는 법이야. 당신의 형제들도 사람이야. 꼭 기억해두게! 큰오빠에게 말해. 이번 일요일에 나한테 오라고 말이야.” (「은둔자」, 36쪽)
은둔자 사벨은 어떤 주어진 이념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위해 만들어진 형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렇기에 복합적이고 모순을 지닌 형상이다. 사랑과 위로를 베푸는 성자와도 같은 현재의 삶과 추하고 일그러진 외모, 그리고 어두운 과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그의 모습은 알록달록 교묘하게 짜놓은 인생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을 조롱하는 가장 지독한 운명, 대답 없는 사랑이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극적 페이소스
고리키가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념적인 인간의 주조가 아니라, 균열된 이념의 틈새에서 숨 쉬고 아파하는 다양한 빛깔의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된 감정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여배우에 대한 대답 없는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온 「대답 없는 사랑」의 주인공 토르수예프도 그러한 인물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연인을 위해 침대를 준비해놓으라고 명령한다면 응당 그렇게 할 것이라는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전 재산과 일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오직 그녀 곁에 있기만을 원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녀가 활동하던 극장가 허름한 골목길의 먼지 낀 상점에서 그녀의 사진과 초상화를 팔며 여생을 이어간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대사야말로 고리키 소설의 새로운 인간관을 보여주는 실례로, 비극적‧상상적 사랑의 페이소스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구석의 탁자로 걸어가서 망가진 회갈색 꽃 뭉치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그리고 공허하게 말했다. “꽃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리는데도 그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군요……” (「대답 없는 사랑」, 130쪽)
『대답 없는 사랑』―고리키 소설의 문학적 실험장
수록작 중 「어떤 소설」은 화자와 서사 형식에 대한 작가의 복잡다단한 생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작품을 전지적으로 서술하는 자이면서 자신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소설 속의 논쟁에 끼어들기까지 한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역시 스스로 ‘소설 밖으로’ 걸어 나와 스스로 자신을 완결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의 논쟁은 소설과 현실, 주인공과 독자에 대한 문제로서 소설 창작의 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자기 점검에 해당된다. 즉 소설 형식 자체에 대한 소설인 셈이다. 새로운 형식과 색다른 어조를 추구하던 고리키는 드디어 자신의 추구 자체를 소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는 『대답 없는 사랑』의 수록작들에서 작가가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주인공의 독립적인 생애와 내면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의 고리키 문학이 직접 체험에 기초한 사실적 구성에 주로 의지하는 작품이었고, 거기서 작가는 항상 일정한 평가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관점을 대변하는 주인공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작품집의 여러 주인공들은 화자인 ‘나’의 생애와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로서의 주인공들이다.
고리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소설 형식의 고민은 『대답 없는 사랑』의 다양한 소재와 주인공, 주인공들의 이념적 다양함과 존재적 다양함을 그대로 작품에 담아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문학적 실험에 매번 즐거운 고통을 느꼈을 팔십여 년 전 러시아의 한 위대한 작가가 남긴 마지막 단편집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 단편집은 제 내면에서 자라고 있는 무성한 수염을 깎아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련의 새로운 형식, 다른 어조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아주 어렵고도 책임을 요하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모색들이 아주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_막심 고리키
이 작품집이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활로를 모색하는 우리 독자들에게 깊은 사색과 통찰을 던져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어렵다면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읽을수록 깊은 재미와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막심 고리키의 작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기에도 부족함을 없을 듯하다. _이강은(옮긴이)
▶ 막심 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 본명은 알렉세이 페시코프. 1868년 볼가 강 연안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 속에 각지를 방황하며 거의 독학으로 글을 깨우쳤다. 이 시기의 체험은 뛰어난 명작으로 평가되는 자전적 삼부작 『어린 시절』 『세상 속으로』 『나의 대학』에 아프고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1892년 『마카르 추드라』로 문단에 데뷔했고, 1895년 『첼카시』를 발표해 큰 명성을 얻었다.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과 같은 황금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도시 빈민과 부랑자, 노동자의 삶과 의식을 대담한 낭만적 문체로 그려냄으로써 20세기 초 러시아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가폰 신부가 이끄는 시위에서 강력한 대정부 성명을 발표하여 곧바로 투옥되었으나 세계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항의로 석방, 1907년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이후 귀국할 때까지 7년간 『어머니』와 자전적 삼부작 『이탈리아 이야기』 등의 작품을 쓰면서 러시아 혁명을 적극 지원했다. 1917년 볼셰비키의 폭력성고 권력욕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갈등을 일으킨 그는 레닌의 비호 아래 소련 정부와 타협하고 문화예술인 보호와 문화재건 운동에 앞장섰으나, 1921년 신병 치료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망명 아닌 망명 생활에 들어간다. 1932년 완전 귀국하여 소련 작가동맹 초대 의장을 맡았고 스탈린과의 내적 갈등 속에서 『클림 삼긴의 생애』를 집필하던 중 1936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이강은 |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반성과 지향의 러시아 소설론』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막심 고리끼』 『해석적 패러다임으로서의 반성과 지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청년 고리끼』 『레프 톨스토이 1, 2』 『세상 속으로』 『이탈리아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막심 고리키를 비롯한 러시아 소설과 소설 이론, 러시아 혁명이 문학과 문학 이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 초판발행 | 2009년 6월 5일
. 140*210(무선) | 584쪽 | 값 14,000원
. ISBN 978-89-546-0815-2 03890
. 책임편집 | 강건모 (031-955-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