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종교, 사랑, 그리고 천국…… 죽음과 벌이는 한판 이야기 승부!
터키 최고의 작가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우리 꿈속의 조각들
17세기 터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현실과 꿈, 환상과 지식을 좇는 이들의 파란만장한 모험을 그렸던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의 작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소설 『에프라시압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터키 민속과 역사에서 빌려온 소재, 터키 고어의 빈번한 사용 등으로 가장 ‘터키적인’ 작가로 꼽히는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는 1995년 데뷔 이후, 존재하는 현실인 동시에 현실과 환상의 접경지대인 ‘꿈’의 언어와 메타포에 기초한 뛰어난 상상력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철학 박사 출신으로 현재 에게 대학교에서 고대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축을 잇는 철학적 주제들을 낯설고 기묘하고 신비한 이야기들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특히나 이번에 소개되는 『에프라시압 이야기』는 그의 깊은 철학적 사유와 풍부한 상상력을 느낄 수 있는 소설로, 목숨 빚을 받으러 온 죽음과 목숨 빚을 갚아야 하는 노인 젯잘 데데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 한 편당 한 시간씩 목숨을 연장해주겠다는 죽음의 제안으로 이야기 게임을 하게 된 그들은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섬뜩하고 엄숙하고, 가슴 아프고 애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모두 공포, 종교, 사랑, 그리고 천국 등 우리 인간의 삶과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는 주제에 관한 것들이다. 형식적으로는 『데카메론』과 『천일야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가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한순간에 허물어뜨리는 보르헤스 식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까지 나아간다.
“당신이 이기면 내 목숨을 가져가시오,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백 년의 수명을 더 주시오!”
어느 날, 아나톨리아 중부의 한 마을에 사는 폼 잡기 좋아하는 건달에게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이 찾아온다. 이승에서의 기한이 다 되어 데리러 왔다는 죽음에게 그는 내기를 제안한다. 네 명이 하는 으뜸패 게임을 해서 이기면 백 년의 수명을 더 주고, 만약 지면 자신과 편먹은 사람의 목숨도 가져가라는 것이다. 죽음은 그 제안을 수락하고 검은 장정의 명부에 올라 있는 젯잘 데데라는 칠순 노인을 찾아간다. 마침 손자 손녀들과 함께 있던 젯잘 데데는 죽음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 거인 에프라시압의 보물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음 날 아침 함께 보물을 찾아 떠나자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잠재운다. 그리고 죽음에게는 아이들이 잠들면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일곱 시간 뒤 찻집으로 향한다. 결국 젯잘 데데와 한편이 되어 건달을 이김으로써 건달과 그와 편먹은 사람의 목숨까지 거두게 된 죽음은 젯잘 데데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고 싶다며 이야기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 자체가 주는 즐거움 이외에는 그 어떤 목적, 규칙 그리고 조건이 없는 게임, 그러니까 진짜 게임을 하지. 난 자네가 손자 손녀들에게 전설, 동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넨 이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 한 주제를 택해서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로 하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서 말일세. 이야기 한 편당 자네에게 한 시간의 목숨을 더 허락하겠네. 어떤가?” _본문 23쪽
그들은 이제 검은 장정의 명부에 올라 있는 우준 이흐산이라는 남자를 찾아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패러디, 상호텍스트성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적 기법들을 통하고 있다.
엄격한 규율과 통제, 공포를 통해 운영되는 기숙학교에 새로 부임한 뱀파이어 교장과 빛을 그리는 천재 소년 화가의 섬뜩한 이야기 ‘화창한 날’, 닿는 순간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 왕을 연상시키는 ‘비다즈의 저주’,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 이맘이 성지 순례를 원하는 노망난 노인과 늑대 소년을 데리고 메카가 아닌, 인도로 순례를 떠나는 종교적 관용에 관한 이야기 ‘어느 성지 방문’, 부유한 상인 압튈제야트가 꿈에서 만난 살리흐 노인의 훈계를 듣고 떠나는, 호접지몽을 연상케 하는 자아의 기나긴 여정 ‘세계사’, 자식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무찔러야 하는 지하실의 거대 쥐와 홀아비 슬하의 사 형제, 과부 슬하의 네 자매 이야기 ‘에지네의 괴물’, 그림 형제의 동화 <빨간 모자>의 패러디 ‘포도주와 빵’, 아이는 황새가 데려다준다는 내용의 서양 우화를 모티프로 부모의 상반된 기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년 슈퍼맨을 그린 ‘하늘에서 온 아이’ 등 죽음과 젯잘 데데는 수천 년 역사의 뱀파이어 이야기에서 어린이의 순수성이 위협받는 이 시대의 암담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고 나서, 다음 이야기 주제를 뭐로 할 것인지 생각하는 죽음에게 젯잘 데데는 이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실 난 당신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한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는 한 편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 이야기는 영원히 지속될 거요. 하지만 이야기꾼이 나인 것으로 보아 당신이 추측하듯 너무 지루할 거요. 나는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오. 우리네 삶도 이러하지. 지금까지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소.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소. 보시오, 잠시 후면 해도 서산으로 넘어가겠소.” _본문 305쪽
그때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손자 손녀들이 멀리서 젯잘 데데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온다. 에프라시압의 보물을 할아버지 혼자 찾으러 갔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자기들도 데려가달라고 조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죽음이란 것을 알아채곤 할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이내 방패처럼 가슴을 펴고 앞으로 나와 주먹을 꾹 쥔다. 그러자 죽음이 한 가지 게임을 제안한다.
“좋아, 정 그렇다면 너희들과 게임을 하자. 봐라, 곧 해가 떨어질 것이다. 너희들에게 해가 지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주겠다. 그 시간 안에 나를 웃기거나 미소 짓게 한다면 너희 할아버지를 두고 가겠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데리고 갈 테다. 어때, 내기를 하겠느냐?” _본문 314쪽
아이들은 갖가지 재주를 다 부려보지만 감정이 봉인된 죽음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다. 곧 해가 떨어지려는 순간, 가장 어린 손녀가 죽음 앞에 선다. 그리고 죽음은 소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어린 소녀의 얼굴을, 그 얼굴에 나타난 글자를, 동화를, 그리고 천국을 본다.
두 세계를 잇는 은밀한 과정으로서의 꿈, 『에프라시압 이야기』
이 작품 역시 전작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와 마찬가지로 꿈이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꿈은 생각하기에 따라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세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가 맞닿아 있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해되지 못할 어떤 세계와 또다른 세계가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통로일 수도 있다. 이런 기묘한 상상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하고도 충만한 단서이며 그의 작품 전반에 고루 나타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특히 죽음이 들려주는 ‘세계사’라는 이야기에서 부유한 상인 압튈제야트가 꿈에서 만난 살리흐 노인의 훈계를 듣고 떠나는 기나긴 여정은 결국 우리의 삶이 다다라야 할 길을 보여준다.
『에프라시압 이야기』에서 한 편의 독립된 이야기는 작품 안에서 완전히 독립된 한 편의 또다른 이야기와 만나고 녹아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사람의 현실이 다른 한 사람의 꿈과 만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모두가 사라지거나 혹은 모두 존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꿈속에서 만난 인물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은 꿈처럼 허망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결국 삶이 되는 거라고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데카메론에서 천일야화로, 거기에서 보르헤스의 서술 방식으로, 전속력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건너뛸 정도로 다양한 문체와 소재가 포함되어 있다. 죽음은 우리 삶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맘껏 살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_터키 문예지 <비르귈>
죽음은 게임을 좋아한다.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 <제7의 봉인>을 본 후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은 환상적인 요소와 풍자적인 서술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젯잘 데데와 죽음이 나누는 대화이다. 우리는 아나르 덕분에 죽음-삶-믿음의 삼각지를 돌아다닐 수 있다. 반드시 읽어야 할 걸작! _터키 온라인 서점 <이데픽스> 독자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젯잘 데데는 말한다. 하지만 그 끝은 다만 우리가 꾸는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처럼 또다른 어떤 삶으로 이어지는 찰나일지 모른다. 그러한 꿈을 살아가는 이야기처럼, 그러한 꿈을 경험하는 독자들처럼, 그것을 기나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우리의 삶처럼, 작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는 모두와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아가며, 그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_「옮긴이의 말」에서
▶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İhsan Oktay Anar
1960년 터키 요즈가트에서 태어났다. 에게 대학교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같은 대학에서 고대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1995년 첫 소설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를 발표한 작가의 소설들은 주로 역사적 사실과 특히 오스만 제국에 관한 루머들, 옛날이야기와 비슷한 서술방식에 기반을 둔 판타지소설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하고 독특하게 잘 다듬어진 등장인물과 철학적 주제의식, 민속 문학이나 문화에서 빌려온 신비로운 요소 등이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서 신화나 역사적인 경전 등에서 쓰인 터키 고어를 자주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가 작품마다 그 자신을 반영하는 ‘우준 이흐산(‘키 큰 이흐산’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흐산은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띄는 외모와 달리 강의와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뿐 언론이나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며 은둔자적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터키에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별다른 광고 없이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1995), 『기계의 서』(1996), 『에프라시압 이야기』(1998), 『아마트』(2005), 『말 없는 사람들』(2007) 등이 있다.
▶ 옮긴이 이난아
한국외대 터키어과를 졸업하고 터키 국립 이스탄불 대학(석사)과 앙카라 대학(박사)에서 터키 문학을 전공했다. 앙카라 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5년간 외국인 교수로 강의했으며, 현재 한국외대 터키어과 강사로 있다. 저서로 『터키 문학의 이해』 『터키-한국어, 한국어-터키어 회화』(터키어) 『오르한 파묵과 작품 세계』(터키어)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하얀 성』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내 이름은 빨강』 『눈』 『새로운 인생』 『검은 책』 『살모사의 눈부심』 『위험한 동화』 『감정의 모험』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생사불명 야샤르』 『툴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제이넵의 비밀편지』 『바닐라 향기가 나는 편지』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개가 남긴 한마디』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등 다수가 있으며, 엮은 책으로는 『세계민담전집-터키편』이 있다. 『한국 단편소설전집』 『이청준 수상전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터키어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 초판발행 | 2009년 8월 20일
+ 140*210(무선) | 328쪽 | 값 11,000원
+ ISBN 978-89-546-0867-1 03890
+ 책임편집 강건모 (031-955-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