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넘은 할아버지가 개구쟁이 골목대장으로 되돌아가다.
2007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문인수 시인의 첫 번째 동시집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던, 엉뚱하고 못된 짓만 골라 하던, 덩치는 작고 힘도 세지 않으면서 힘이 가장 센 것처럼 굴며 악동 노릇을 도맡아 하던, 아이가 있었다.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 잘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거듭된 당부를 받들어, 남루한 행색으로 마을을 떠도는 거렁뱅이 할아버지한테 “아침 잡쉈습니까.” 꾸벅 절하고 냅다 달아나던 엉뚱한 개구쟁이가 어느덧 예순 중반을 넘어선 시인이 되었다. 그가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시’는 그의 젊은 시절과 함께 방황하며 반평생을 동고동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그렇게 몇 십 년을 시인의 가슴속에서만 끙끙 앓던 시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마흔이란 나이에 늦깎이로 데뷔한 문인수 시인은 지금껏 일곱 권의 시집을 냈다. 절제된 언어와 애잔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이 돋보이는 시편들을 통해 시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미당문학상을 수상하며 그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바 있다.
이번에 문인수 시인이 선보이는 첫 번째 동시집 『염소 똥은 똥그랗다』는 그의 시 세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쓸 때보다 더 끈끈하고 재미있었다는 동시 쓰기는 그의 인생이라는 장면 속에 별꽃처럼 깃든 어린 시절의 생각들, 그 ‘숨은그림찾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이 든 시인도 감각적인 동시, 젊은 동시를 쓸 수 있다.
‘참’시인의 마음에 살아 있는 ‘참’동심
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의 옷자락인가
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흰 구름」 전문
문인수 시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문예반 숙제로 쓴 석 줄짜리 동시이다. ‘김삿갓’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담당 선생님의 큰 칭찬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황홀했고, 바로 그 사건이 오늘날 그를 시인으로 살게 한 시발점이라고 한다.
아래 동시는 이번 동시집에 들어간 작품으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동시 「흰 구름」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
구름은 산 너머 너머에서 온다
산속 가난한 마을을 뭉게뭉게 살펴보다가
제 근심만 뭉게뭉게 잔뜩 더 부풀어
구름은 산 너머 너머로 간다
-「흰 구름은 뭉게뭉게 근심만 부푼다」 전문
문인수 시인의 동시는 평범하고 익숙한 것 같지만 그 이면에 깊고 그윽한 시선과 겸손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때문에 더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독자는 그 감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쉽게 빠져든다.
비가 내리자 금세
쟁쟁하던 매미 소리가 뚝, 그쳤다
소리도 젖는구나
운 걸까, 노래한 걸까
아무튼, 햇볕 나면 또 쟁― 쟁― 쟁―
널어 말려야겠지
-「매미 소리 뚝, 그쳤다」 전문
염소가 맴맴 풀밭을 돈다
말뚝에 대고 그려 내는 똥그란 밥상,
풀 뜯다 말고 또 먼 산 보는 똥그란 눈,
똥그랗게 지는 해,
오늘 하루도 맴맴 먹고 똥글똥글,
똥글똥글 염소 똥
-「염소 똥은 똥그랗다」 전문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자연물이나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는 결코 쉽게 쓰지 않는다. 그렇기에 독자는 쉽게 읽지 못하고, 쉽게 잊지 못하게 된다.
위의 두 동시도 행간을 천천히 곱씹어 봐야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매미 소리 뚝, 그쳤다」에서 ‘매미의 젖은 소리를 햇볕 나면 널어 말린다’는 것은 공감각적인 시상의 확장이다. 자연물과 사물의 형상만이 아니라, 소리도 이미지화되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염소 똥은 똥그랗다」라는 제목처럼 염소 똥이 똥그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밥상에서 눈으로, 다시 해로, 마침내 염소 똥으로 바꾸어 가며 환유의 맛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문인수 시인의 시와 동시에서 느껴지는 건, 어른을 대상으로 쓰는 시나 어린이를 염두하고 쓰는 동시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를 잘 쓰는 사람, 즉 참시인의 마음에는 참동심이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물, 혹은 대상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집요한 관찰이 이어지다.
새로운 발견에서 시작된 산뜻한 시선
시상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냐고 묻자, 문인수 시인은 “그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관찰이다. 관찰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자답이다. 그것에 대한 반성과 확신에 찬 발견이 시상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시와 동시를 보면 시적 관찰력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새로 시멘트 바른 바닥을 밟았다
물컹, 발자국 하나가 찍혔다
수돗가 바닥에 커다란 입이 생겼다
깜짝, 놀란 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앗, 나의 실수」 전문
건널목 차단기가 철컥, 내려졌다
건너편에 같은 반 친구가 서 있다
서로서로 손 흔들며 반갑게 웃었다
기차가 답답하게, 너무 길게 지나갔다
드디어 앞이 환해졌다
친구랑 나랑 힘을 합쳐 기차를 밀어낸 것 같았다
어디 가? 학원……
넌? 나도……
우리는 자꾸 돌아보며 헤어졌다
좀 더 친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 봐!」 전문
「앗, 나의 실수」를 보면, 수돗가 바닥에 생긴 발자국의 이미지를 재미있고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한편 「내일 봐!」에서는 이 학원 저 학원 뺑뺑이 돌아야 하는 아이들의 긴 하루가 너무 길고 답답한 기차의 움직임과 맞물려 더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처럼 낯익은 사물 또는 대상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줄 아는 문인수 시인의 시선은 여전히 젊고 파릇파릇하다. 그러한 열정적이고도 집요한 관찰은 곧바로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상큼하게 혹은 아릿하게 버무려져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그의 ‘관찰’은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빛을 발하며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그 어디라도 가 닿을 수 있는 그의 열정 넘치는 시선은, 그의 시와 동시를 통해 우리 가슴에 오래도록 뜨겁게 남을 것이다.
평소 문인수 시인과 아버지와 딸처럼 살갑게 지내는 김민정 시인이 쓴 독후감도 만날 수 있다. 딱딱한 해설이 아닌 어린이들에게 살뜰히 눈높이를 맞춰 쓴 독후감이 아기자기한 맛을 준다. 선배 시인인 문인수 시인의 시 세계와 더불어 처음 펴내는 동시집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마음속의 한 어린아이에게 끊임없이 답을 해 주고 밤낮없이 놀아 주느라 어른이 될 겨를을 잊은”, “마음속의 한 어린아이와 쌍둥이처럼 닮아 버”린 문인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린이들의 시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